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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과거, 국방력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프레임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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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지리적으로 북미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전쟁과는 동떨어져 보이나
실제로는 영국의 식민지로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이 참전한 수많은 전쟁에 자동으로 참전했음
미영전쟁을 시작으로 보어전쟁, 제1, 2차 세계대전, 6·25전쟁, 아프간전 등
다양한 국제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음
 

 

특히, 미영전쟁 당시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점령해 백악관을 불태운것도 식민지 캐나다군의 활약.
캐나다는 2차세계대전 전후로 캐나다의 경제,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산업화되기 전까지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혹한의 캐나다 대자연과 싸우며 먹고 살아온 농부, 수렵꾼, 벌목꾼 같은
강인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1차산업 종사자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기량이 다른 나라 군대보다 높았음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해 독일군한테 악명이 높았고
 
전쟁 당시 적을 가장 많이 사살한 저격수도 캐나다군이 배출함
 
 
 
(378명 사살한 원주민계 캐나다군 프랜시스 페가마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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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2차세계 대전에서도 활약했는데 캐나다군은 110만명이 참전하였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캐나다군은 상륙 15분만에 독일군 진지를 돌파해 주노 해변을 점령하고
영국군이 고전하고 있던 골드 해변의 후방을 차단해 독일군들을 포위섬멸해서
 
1시간 먼저 상륙한 미군보다 더 빨리 해변을 장악함

캐나다군이 상륙한 주노 해변은 미군이 상륙한 오하마 해변 다음으로 사망자 수가 나온 곳으로

캐나다군의 15분의 기적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캐나다군의 피지컬로 해냈다는것.


대전 기간에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캐나다 병사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6.25전쟁에서도 캐나다군은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는데

 

당시 캐나다군의 절반을 한국으로 보냈다.

 

 

 

6.25전쟁때 캐나다군이 가장 활약한 가평 전투는
캐나다군 보다 13배나 많은 중공군 6000명을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의 지원 하나로 버틴 전투로
자신들의 참호에 포격요청을 했을정도로 긴박했는데 결국 캐나다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때 캐나다군은 1개 대대 수준인 450명으로 6000명이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47명의 사망자와 99명의 부상자를 내고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평 전투로 인해 중공군은 이후 더 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지 못 하고 38선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어
한국전쟁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는 병사들의 기량만 높은게 아니라 방위산업도 상당이 높은편에 속한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가 생산한 군수품들은
 
 

 

소총 170만정

 

 

80만대의 군사차량

 

 

 

 

 

 

 

 

5만대의 탱크

 

 

 

4만대의 대공포

 

 

 

16000대의 군용기

 

 

 

1만톤급 선박 348대를 생산해서 연합국들한테 공급했다
이렇게 캐나다는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루며 경제를 크게 키울 수 있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캐나다는 세계 3위의 교역국이 되어 있었다.
 
또한, 세계 4위 규모의 공군력을 갖게 됐고, 전쟁전 불과 수 척의 군함밖에 없었던 해군은
400대 이상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뿐만아니라 6·25전쟁 중 한반도 상공을 수호하던 항공기 중 상당수가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캐나다의 방위산업은 2차대전 중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육·해·공 전 분야에서
독자적인 기술과 전문기술인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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