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왕위 계승권자들이라고 썼는데, 즉위하지 못한 세자나 왕위를 주장할만한 명분이 있던 왕자/왕손들을 통칭했다고 생각해주시길.
총 20명을 다룰겁니다.
1. 정변으로 인한 폐세자 3명
- 의안대군(1차 왕자의 난), 폐세자 이고(중종반정), 폐세자 이지(인조반정)
2. 부왕보다 먼저 사망한 세자 7명
- 의경세자(세조 장남), 순회세자(명종 독자), 소현세자(인조 장남), 효장세자(영조 서장자), 사도세자(영조 서차자. 이쪽은 사실상 영조가 죽였다), 문효세자(정조 서장자), 효명세자(순조 독자)
3. 그냥 못나서 쫓겨난 폐세자 1명
- 양녕대군(태종 장남)
4. 나라가 망해서 즉위 못한 태자 1명
- 의민태자(고종 7남)
5.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데 밀린 왕족 8명
- 진안대군(태조 장남), 순성군(태종 장손), 효령대군(태종 차남), 월산대군(세조 장손), 제안대군(예종 차남), 임해군(선조 서장자), 영창대군(선조 적자), 경선군(인조 장손)
1. 진안대군 이방우(1354~1393)
이성계의 장남임에도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유에 여러 추측이 있다. 고려의 충신설, 고려 충신들과의 혼맥으로 배척됐다는 설, 우창비왕설 명분에 걸린다는 설 등.
마지막 설이 맞다면 꽤 억울하다. 아버지 명에 따라 우왕 대신 창왕을 인정해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더니, 그새 내부 상황이 바뀌어 창왕도 부정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것. 즉 반역자 창왕을 위해 활동한 셈이 됐고, 실제로 창왕 폐위 후 이방우의 정치 행보도 사라진다.
주요 후손: 배우 이경영(19세손)
2. 의안대군 이방석(1382~1398)
이성계의 아들 8형제 중 막내인데다, 공이 많은 이복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는데도(장남 방우와 28세, 5남 방원과 15세 차이) 형들을 제치고 10세에 세자가 된다. 하지만 이복형들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폐위된다.
당시 유일하게 사병을 지닌 동복형 이방번이 도왔다면 승산이 있었으나, 행복회로를 돌리며 방관했다.
그렇게 방번과 방석은 사이 좋게 귀양길에서 암살당한다. 향년 16세.
조선 왕조 최초의 세자이자, 최초의 폐세자이기도 하다.
조선 왕사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첫 단추부터 보여준 셈.
3. 양녕대군 이제(1394~1462)
아마 <태종 이방원>으로 이미지가 가장 바뀐 인물이 아닐까.
사실 고증에 충실하면 이쪽 묘사가 맞다.
3대 태종의 장남. 사실 위로 요절한 형 셋이 더 있다. 실록에는 태종의 회고로만 등장한다.
이렇게 힘들게 얻은 아들이라 태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인간이 평타, 아니 적당히 하타만 쳤어도 충녕이 감히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위투쟁은 자기 대에서 끝내고 적장자 계승 원칙을 세우고 싶었던 태종은 어떻게든 양녕을 사람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아래 모든 내용은 태종 18년(1418)의 일이다.
- 태종이 아끼던 막둥이 성녕대군이 홍역으로 요절했다. 향년 12세.(2월 4일) 이때 충녕은 의원과 함께 의서를 보고 직접 약을 써 모두가 감탄했으나, 양녕은 활쏘기 놀이를 했다.
- 세자가 어리를 다시 들인 게 들통나자 태종은 성녕 때 일을 꺼내 “네가 사람이냐?”며 세자를 혼내고, 구전으로 내쫓아 마지막 경고를 한다.(5월 10일)
- 며칠 후 세자가 이런 편지를 보냈다. 태종은 어이가 없어 신료들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한탄한다.(5월 30일)
<태종실록 35권, 태종 8년 5월 30일 기묘>
(sillok.history.go.kr/id/kda_11805030_001)
- 4일 후 태종은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는다.(6월 3일)
이 정도면 제발 폐위해달라고 시위한 수준이다. 그래서 후대에 ‘사실 양보하려고 일부러 저런 거 아냐?’ 하는 말이 나온 것 같다.
폐위 후에도 끊임없이 사고를 쳤다. 태종마저 양녕이 왕권에 위협이 되면 죽이란 유언을 남겼고, 주기적으로 처벌하란 상소가 올라왔기에 숙청할 명분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세종은 언제나 양녕을 감싸주었다.
양녕은 훗날 수양대군 편을 들어 단종을 죽이는 데 일조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망나니로 즐기며 살다가 세조 8년(1462) 68세로 죽었다.
의외로 명필이라 양녕의 글씨는 조선조 최고로 친다.
주요 후손: 무의공 이순신(7세손), 대통령 이승만(17세손), 가수 이승기(20세손)
4. 순성군 이개(?~1462)
양녕대군의 장남. 태종은 양녕을 폐위하고 처음엔 장손인 순성군을 세우려 했으나 대신들이 반대했다.
순성군을 정말 후계자로 삼으려면 아들에게 정치적 부담이 될 아비 양녕을 죽여야 했을 것이다. 영조가 세손 정조로 후계자를 바꾸며 사도세자를 죽였듯이.
조선 사상 양위를 제외하고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아들이 즉위한 경우는 흥선대원군/고종의 한 번뿐이다.
5. 효령대군 이보(1395~1486)
3대 태종의 차남. 대신들이 순성군 세손 책봉을 반대하자, 태종은 점괘 안을 냈다 다시 물리고, 택현을 이유로 충녕을 세자에 책봉한다.
순성군과 점괘을 거론한 건 그냥 명분을 위한 형식적 절차였을 것이다. 그 태종이 이런 큰 일을 벌이면서 미리 결정을 안 내렸을 리가.
태종이 마지막에 효령과 충녕을 비교하며 충녕으로 정하자 신하들은 동의했고, 태종은 통곡한다.
이 모든 과정이 실록에 상세히 기록돼있다. 여기서 태종은 효령을 이렇게 평가한다.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심히 곧아서 일처리가 미숙하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중략)
효령대군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사신 맞이도 불가하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3일>
(sillok.history.go.kr/id/kca_11806003_001)
한 마디로 보살. 이후 불자로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90세로 장수한다. 이때가 증손 뻘인 성종 17년(1486)으로, 현손 뻘인 연산군은 이미 10세로 세자 시절이다.
여담으로 양녕은 효령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고기를 구워먹거나, 효령을 사칭해 비행을 저지르는 등 많이 골려먹었다.
한 번은 그 보살 같던 효령이 끝내 폭발하는데, 이때 양녕의 대답이 걸작.
<성종실록 191권, 성종 17년 5월 11일 을묘>
(sillok.history.go.kr/id/kia_11705011_001)
효령대군의 졸기에 기록된 일화다.
의외로 아들을 7명이나 뒀고, 후손이 번창해 효령대군파는 전주 이씨 최대 계파다.
주요 후손: 배우 이정재(20세손), 개그맨 이수근(21세손), 개그맨 이경규(22세손)
6. 덕종 의경세자 이장(1438~1457)
7대 세조의 장남. 세조가 즉위하며 세자가 되지만 2년만에 사망한다. 향년 19세.
시문에 능하고 재주가 뛰어나 세조가 많이 아꼈기에, 사망 당시 크게 슬퍼했다.
덕종이 요절하면서 예종/성종/월산/제안 4명의 서열이 상당히 꼬여버린다.
원래 왕이 될 월산대군은 끝내 왕이 못 됐고, 원래 왕이 안 될 예종과 성종이 왕이 됐으며, 왕위와 거리가 멀던 제안대군은 갑자기 선왕의 적장자란 정통성을 얻었다.
후일 성종이 즉위하며 덕종으로 추존했다.
7. 월산대군 이정(1454~1488)
철저한 자기관리로 살아남은 왕족.
덕종의 장남, 세조의 장손이란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두 번이나 밀려난 인물.
덕종이 죽자 장손 월산대군 대신 차남 예종이 세자가 된다.
세조가 장손 대신 차남을 세자로 세운 이유는 확실치 않다. 본인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트라우마일까? 그러기엔 나이차가 적었다. (당시 월산대군 3세, 예종 7세)
11년 후 예종이 즉위하지만 1년만에 사망한다.
숙부 예종에게 왕위 계승권을 뺏길 때처럼, 월산대군(15세)이 어린 제안대군(3세)의 왕위를 다시 뺏어올 만했다.
하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동생 성종(12세)이 즉위한다.
성종의 장인인 당시 조정 실세 한명회, 수렴청정을 오래 하고 싶던 당시 왕실 실세 정희왕후(세조 비)의 뜻이 맞았던 것.(조선 최초의 수렴청정 사례)
종법상 정당한 계승자지만 두 번이나 밀린 월산대군은 역대 가장 정통성이 강력한, 즉 역모에 휩쓸리기 가장 좋은 왕족이었다.
때문에 시와 풍류를 즐기며 정치를 멀리했다. 성종도 항상 형과 연락하며 예술활동을 지원했고 깊은 우애로 유명했다.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트집 잡힐 실수를 하지 않고, 수많은 시를 남긴 예술가로 살다 성종 20년(1488) 사망한다. 향년 35세.
후손(월산대군파/계성군파)은 꽤 많은데, 엄청 유명인은 없는 듯?
8. 제안대군 이현(1466~1525)
철저하게 바보라서 살아남은 왕족.
8대 예종의 차남. 형이 요절해 사실상 적장자다.
예종이 죽을 때 너무 어려(3세) 사촌형 성종에게 왕위를 뺏겼다.
선왕의 적장자란 존재 자체로 월산대군처럼 강력한 정통성.
하지만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보라서 역모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남는다.
- 성(性)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종은 남녀관계를 모르는 제안을 일깨우기 위해 궁녀를 붙였다. 궁녀가 잠든 제안과 몸을 맞추자(이때 빳빳하게 섰다 하니 고자는 아니다), 놀라서 깬 제안이 물로 그곳을 씻으며 “더럽다! 더럽다!” 소리쳤다. 평생 남녀관계를 못 깨달아 자녀가 없다.
- 소변 보는 하녀의 성기를 보고 ‘오리 둥지’라고 불렀다.
- 거지를 보고 “쌀이 없으면 꿀떡 찌꺼기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 14세에 아내 김씨가 싫다고 어머니(안순왕후)를 졸라 이혼하고 박씨와 재혼했다. 헌데 3년만에 다시 전처와 결혼하겠다며 떼를 쓴다.
<성종실록 179권, 성종 16년 5월 29일 무인>
(sillok.history.go.kr/id/kia_11605029_001)
사실 진짜 바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연기했단 설도 있다. 많은 사극에서 이 설을 채택해 입체적인 인물로 그린다.
- 평소 행실은 바보 같지만, 복잡한 궁중 예법은 정확히 지켰다.(연기가 아니면 서번트 증후군이란 설도 있음)
- “쌀이 없으면 꿀떡” 발언은 진 혜제의 “곡식이 없으면 고기죽을 먹어” 발언과 유사하다. 혜제는 기록만 봐도 지적장애가 거의 확실한 임금이다. 사서를 보고 일부러 따라했을 가능성이 있다.
- 김씨와 굳이 재결합한 이유는 역모에 휩쓸릴 후손을 보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김씨는 병약해 자녀를 갖기 어려웠다.
어쨌든 연산군도 그냥 왕실의 모자라지만 착한 어른 정도로 보고 전혀 경계하지 않았고, 중종 20년(1525)까지 살았다. 향년 59세.
참고로 연산군이 자기 여종들을 자꾸 데려가자 삐진 적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장녹수다. 나중엔 그냥 제안대군 집을 사서 가흥청으로 만들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제안대군이 삐질만했다. 장녹수도 뺏어가고, 집을 기생방으로 만들고. 근데 이 인간 연산군이 탐낼만한 여종들을 여럿 데리고 있었다는 건데, 진짜 남녀관계를 몰랐던 게 맞을까? 연기 맞네, 맞아.
9. 폐세자 이고(1497~1506)
10대 연산군의 차남. 형이 요절해 사실상 적장자다.
할아버지 성종을 닮아 총명했다 하며, 반정 당시 임금은 못미덥지만 세자를 기대해보자며 반대한 신하들도 있다(야사)
하지만 반정은 성공하고, 연산군과 함께 사사된다. 향년 8세
10. 순회세자 이부(1551~1563)
13대 명종의 독자. 그가 요절하면서 왕실 “적통 직계”가 단절됐다.
“적통 방계”를 찾으려면 세종의 자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결국 명종은 가까운 “서출 방계” 중에 후계자를 찾는다.
명종은 이복형(서자) 이초의 3남 선조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조선 최초의 “서출”이자,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 선조는 이렇게 취약한 정통성 때문에 불안한 출발을 했다.
11. 임해군 이진(1572~1609)
14대 선조의 서장자. 광해군의 동복형.
장남임에도 평판이 형편없어 동생 광해군에게 밀렸다. 심지어 양녕처럼 세자를 했다가 밀린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밀렸다.
양녕대군을 능가하는 인간 말종인데, 선조 아들 중에 이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 따로 모아서 글 쓸 생각이다.
어쨌든 광해군 즉위 직후 유배 가서 의문사한다.
12. 영창대군 이의(1606~1614)
14대 선조의 유일한 적자.
서자는 많았으나 적자가 없던 선조는 왜란 후 32세 연하 인목왕후를 새로 들여 적자를 얻는다.
보통 왕비가 사망하면 후궁을 왕비로 올리지만 이례적으로 새 왕비를 간택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서자 대 적자라는 점만 빼면 모든 면에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압도했다.
나이 차이 31세, 세자 생활만 16년, 왜란 중 분조 경험, 추락한 선조를 능가한 권위, 십 수년 함께한 신료들의 지지 등.
그러나 광해군을 과하게 견제하던 선조, 어리고 정치 감각이 없어 광해군을 자극한 인목왕후, 탁소북의 영창대군 지지 등 여러 사유로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경계했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 선조와 경쟁한 트라우마로 의심병이 심했다.
조용히 있어도 위험할 판에 눈치 없는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의 의복과 대우를 자꾸 대군이 아닌 세자 수준으로 높였다.
집안도 한미하고 탁소북도 몰락해 아무 힘도 없는데 광해군과 맞서려고 한 건 아닐테고, 아마 귀한 아들을 너무 아끼는 마음이었겠지만 광해군은 이를 도발이자 위협으로 느꼈다.
결국 영창대군은 광해군 5년(1613) 역모죄로 유배 가서 다음해 의문사한다. 향년 8세.
인조 반정 후에도 정확한 사인을 못 밝혔다. 죽였다는 설도 있고, 사망 전날 위급하단 보고를 올린 걸로 보아 그냥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반정 세력은 ‘폐모살제’가 명분이기 때문에 무조건 전자여야 하는데, 혹시 후자일까봐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덮었다.
13. 폐세자 이지(1598~1623)
15대 광해군의 장남.
인조반정 직후 자결했는데, 정작 광해군은 1641년까지 장수했다.
14. 소현세자 이왕(1612~1645)
16대 인조의 장남.
1625년 세자로 책봉돼,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에 볼모로 갔다 1645년 귀국한다.
볼모 시절 청의 문물을 접하고, 조선 포로들의 귀국에 힘쓰는 등 정치적 역량을 키웠다.
하지만 인조는 귀국한 소현세자와 대립했고, 귀국 3개월만에 돌연사했다. 향년 33세.
15. 경선군 이백(1636~1648)
소현세자의 장남.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신료들은 원손 경선군을 세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차남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이 일반적인 논의과정도 없이 꽤 일방적인데다, 다음 해엔 세자빈 강빈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시키면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오죽하면 소현세자와 애증 관계인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 아들들을 차라리 자신이 데려가 키우겠다고 요청할 정도였다.
인조는 이미 아들 둘은 죽었다는 거짓말로 거절했는데, 몇 달 후 실제로 두 명이 죽었다.
경선군과 둘째 경완군이 유배지에서 역병으로 죽은 것. 향년 13세.
정황과 이유, 암살 여부엔 여러 설이 있지만, 인조가 소현세자와 그 가족을 일방적으로 숙청한 것은 확실하다.
16. 진종 소황제 효장세자 이행(1719~1728)
21대 영조의 서장자. 10세에 요절해서 잘 안 알려져 있는데 사실 왕실 족보상 중요하다.
훗날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으면서 정통성을 위해 정조가 효장세자 아들로 입적된다.
때문에 왕실 족보상 정조부터 순종까지 모두 그의 자손이 되고, 양자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그를 진종으로 추존한다.
또 진종-정조-순조-문조-고종으로 이어진 왕실 족보상 고종의 4대조가 되어 대한제국 소황제로도 추존됐다.
17. 장조 의황제 사도세자 이선(1735~1762)
21대 영조의 서차자. 효장세자가 죽고 7년만에, 심지어 4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라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 결말은 너무 유명하니 생략.
장남 의소세손은 요절했고, 차남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서 대를 이었다.
18. 문효세자 이순(1782~1786)
22대 정조의 서장자.
정조 역시 늦은 나이에 첫 자녀를 얻어 총애했고, 일찍 세자로 책봉했으나 홍역으로 요절했다.
이로써 진종 효장세자(영조 장남), 의소세손(사도세자 장남), 문효세자(정조 장남)까지 3대에 걸쳐 장남이 자녀 없이 요절하고, 왕실 직계 단절의 요인 중 하나가 된다.
19. 문조 익황제 효명세자 이영(1809~1830)
23대 순조의 독자.
외모, 재능, 지식 모두 뛰어난 엄친아로 고작 3세에 세자로 책봉됐다.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는데, 보통 대리청정을 명하면 신하들이 결사반대하는 것과 달리, 순조가 정말 아파서 넘긴 거라 별 반대가 없었다.
이전의 많은 대리청정 사례에서 부왕과 세자가 정치 싸움을 벌인 것(태종-양녕대군, 선조-광해군, 영조-사도세자, 영조-정조 등)과 달리, 원래 정치에 의욕에 없던 순조는 모든 권력을 아들에게 줬고 효명세자도 안정적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세종-문종 이후 가장 훌륭한 대리청정 사례.
이렇게 즉위 전부터 성군의 자질을 뽐냈으나, 갑자기 병사했다. 향년 20세.
이후 효명세자의 어린 아들 헌종이 왕위를 잇는데, 만약 효명세자가 오래 살았으면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를 끊고 조선 말의 혼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순조는 정통성과 오랜 재위기간 덕에 왕권은 강했지만 본인이 정치를 놔버려서 안동 김씨를 내버려 둔 편이었다. 효명세자가 왕위를 이었으면 세도가들도 몸을 사렸겠지만, 7살배기 헌종이 오르면서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4년 후 고종이 효명세자의 양자로서 즉위한다.
20. 영친왕 의민태자 이은(1897~1970)
26대 고종의 7남.
이복형 순종이 즉위하며 대한제국 황태자가 됐다.
이미 일본이 고종을 강제폐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만큼 사실상 일본의 볼모로 살며 일본 황족과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이왕 직을 계승해 해방 전까지 이었다.
일본군 장교로 2차대전도 참전했고, 대한제국 황실을 부정하던 이승만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하다가 박정희가 집권한 1963년에야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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