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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이슈, 일상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여진족의 전투

by 프레임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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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592년 한창 조선팔도가 일본군에게 탈탈 털리던 시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선-만주 국경에 도달한다.

 

가토는 함경도에서 임해군을 포로로 잡기도 한다.

 

기요마사는 원래의 목표인 중국 침공을 위한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150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만주를 탐사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기요마사가 이끌고간 병력의 대다수는 조총병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그래서 사실 누가봐도 점령이나 큰 전투를 목적으로 올라간건 아니었음.

 

 

여기서부터는 일본측과 조선의 기록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서 일본측의 기록부터 서술하겠음

 

 

 

 

 

 


 

키요마사는 회령의 조선인을 길잡이삼아 여진족의 거주지 오란카이에 진입하여, 
국자로 (중국 지린성 연길) 일대에 13개 여진의 부락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오란카이의 성을 무너뜨리고 야영 했다. 
그 날밤 오란카이인 3천이 북을 치고 반궁을 발사하며 야습해오자 조총으로 격퇴하고 
이른 아침까지 추격해서 추격해서 오란카이가 수도로 여기는 산상에까지 도착했다 


여진도 사방에서 키요마사부대를 요격해, 키요마사의 측에도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키요마사는 히데요시에게 보고하기를 
①오란카이에서 명으로 통하는 루트를 찾았지만, 오란카이는 조선의 2배 정도 넓고, 
여기로부터 명에 진출에 하려면 타타르족(몽골 지역)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것은 무리이다 ,

②오란카이는 밭뿐으로 잡곡 밖에 생산되지 않고, 군량미가 손에 들어 올 전망은 없다,

③오란카이에는 일본의 다이묘와 같은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통솔자는 없다고 보고하였다

(『加藤清正 朝鮮侵略の実像』北島万次・吉川弘文館・歴史ライブラリー230)



즉 요약하자면

 

가토의 군대는 여진족을 줘패면서 13개의 성을 함락했으나 인해전술로 밀고오는 여진족의 병력이 포위할 조짐을 보이지 재빠르게 후퇴했다고 적고 있음.

 

아무래도 조선의 전쟁이 마무리된 상황도 아니고 정예병력은 데려오지 못했으니 전투를 길게 하기보다 빠르게 후퇴하는걸 선택한것으로 보여짐

 

 

 

 

 

 

자 이제는 조선측 기록을 보자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가토가 마침내 군사를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너 깊숙이 노토 부락(老土部落)까지 들어가 성을 공격하니 호인이 사방에서 일어나 요격하여 사졸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이에 진로를 바꾸어 종성(鍾城)의 문암(門岩)을 경유하여 강을 건너 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 차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협로를 따라 경성(鏡城)으로 돌아왔다.

 

 


간단히말해 노토부락의 성을 공격하던중 여진군이 사방에서 공격해와 공성을 포기하고 패퇴했다는 이야기.

 

사실 사료가 워낙 부족해서 어느쪽이 맞고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전투에 직접 참가한 일본측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을것으로 보임.

 

 

 


 

 

그래도 별로 피해 없이 후퇴한 가토기요마사의 일본군 다시 조선군 명나라군과 싸우기 시작했고 울산성에서 지옥을 경험하고도 승리하기도함 ㅋㅋ

 

 

 

 

 

3줄 요약

 

1.가토의 일본군이 여진족 공격함

 

2.성 몇개 뺏고 줘패다가 포위 당해 철수함

 

3.청일전쟁과 만주사변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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