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2대 교주였던 사람이다.
동학농민운동에도 참여했던 최시형은 우금치 전투 이후 동학군이 사실상 와해되자 관군의 눈을 피해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1898년 4월 5일(음력) 낮 12시경에 체포되어 서소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72세의 고령이었던 최시형은 오랜 도피생활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못했고 이에 고등법원은 중죄인을 병사(病死)시키는 것은 나라의 체면과 법의 위엄을 해친다고 판단해 재판을 서둘렀다.
결국 한 달뒤인 5월 29일,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판결을 내린 일원 중에는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시킨 원흉이었던 판사 조병갑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곧바로 형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에 겨우 4일 후인 6월 2일, 단성사 뒤편의 고등법원 감옥서에서 최시형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나무위키에서는 참형당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교수형이 맞다.)
처형 집행 직전에 당시 조선에 주재하던 한 러시아 공사가 최시형의 사진을 촬영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고 곧 허가를 받아 최시형의 모습을 몇 장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진들이 바로 처형 직전의 최시형의 모습이며 두 사진 모두 몇 초 간격으로 촬영된 것이기 때문에 오른손의 위치가 달라진 걸 빼면 별반 차이점은 없다. 그리고 우측에 부착된 <"처교죄인 동학괴수 최시형(處絞 罪人 東學 魁首 崔時亨)">, 즉 "교수형에 처해지는 동학의 지도자 최시형"이라는 표제를 통해 해당 인물이 최시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속 최시형은 동상이나 고문의 영향인지 양발이 퉁퉁 부어있으며 심신이 지친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실제로 이 때 최시형은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해 혼자 앉아 있기도 버거웠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할 때도 누군가가 받쳐줘야 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최시형의 옷고름 부분이 좌측으로 쏠려 뒤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사진촬영 당시 누군가가 최시형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뒤에서 옷 끄트머리를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시형의 옆을 보면 누군가의 소맷자락이 살짝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비록 쇠약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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