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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이슈, 일상

반년이면 끝날 것이라고 여겨졌던 한국전쟁

by 프레임 2023.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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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반년이면 끝날 것이라고 여겨졌던 한국전쟁은 중공군의 등장으로 인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유엔군은 서울을 넘어서 평택까지 밀려났다가 필사적인 반격 끝에 겨우 38선 라인을 회복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은 1950년과 같은 한반도 전체수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전선을 적당히 38선 근방까지만 밀어올리고 공산측과 협상을 통해 현상유지를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매튜 릿지웨이 장군이 설정한 캔자스 라인과 와이오밍 라인이 바로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캔자스 라인은 현 전선이 밀릴 경우를 대비한 최종 방어선, 와이오밍 라인은 북진 한계선이었다

만약 공산측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승기를 잡는다 하더라도 와이오밍 라인 이상 진출을 하려면

유엔군 사령부에 허가가 필요했다

한국전쟁은 이때부터 제한전쟁이 되었다.

 

여태까지 수복한 땅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되찾기 위해

전선에서는 고지와 거점을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만이 계속되었다

인명피해는 엄청났지만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가끔씩 구멍난 전선을 다시 평평하게 맞추기 위한 제한적 공세만이 진행되었다.

 

 

릿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온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아주 큰 한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맥아더 원수의 '만주 핵폭격' 같은 황당무계한 작전은 아니더라도 공산측의 전의를 상실하게 할만한 타격을 가하면

말도 안되는 꼬장을 부리며 회담을 파토내던 북한과 중공도 협상에 나올 거라고 봤다. 

 

이에 따라 밴플리트는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원산에 상륙작전을 펼쳐 공산군의 후방을 타격하여 붕괴를 유도하고

금강산을 포함한 강원도 전체, 그리고 함경남도 이남까지 전선을 끌어올리는 작전인

'맹조의 발톱(Operation Talon)'을 입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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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한반도 동과 서를 이어주는 철원-원산선을 장악하여 북한을 두동강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전황을 확실하게 타개하여 유엔군에게 정치적 승리까지 안겨줄 수 있었다.

 

또한 현 대한민국의 최대 약점인 수도권과의 종심거리를 두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동부전선이 무너지면 서부전선의 공산군 역시 전선을 뒤로 빼서 최대한 보조를 맞추려고 했을 것이고

개성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가 손에 들어오므로 서해5도와 한강하구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었다.

 

황해도는 기존부터 유엔군이 투입 해놓은 반공유격대들 덕분에 공산군이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던 곳으로

유엔군이 북진할 시 이들과 보조를 맞춰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탈환이 가능했다.

 

북한은 강원도의 평강평야, 황해도의 연백평야와 재령평야를 빼앗김으로서

식량생산에 깊은 차질이 생길 것이고 인구 역시 1/3가량을 잃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양이 전선 100km이내로 들어오면서

북한과 한국의 상황이 역전되어 남포를 비롯한 대동강 하구는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밴플리트는 이 작전을 바로 유엔군 사령부에 올렸다

하지만 이를 받아 본 릿지웨이는 바로 기각해버렸다

예상 밖의 기각에 당황한 밴플리트는 일주일만에 작전선을 조금 수정한 새로운 작계를 입안했으나

이 역시 거절 당했다

사령부 측의 기각 사유는 이러했다.

 

 

1. 공산군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이게 자극 받아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더 치열하게 싸울 것이고

그러면 휴전협상은 파토나게 된다.

 

2. 공산군은 인천에서의 교훈을 토대로 상륙작전에 대해 막대한 대비를 해놨다

그리고 우린 1년 전에 이미 원산에 상륙했던 바 있으므로 저들은 더 치밀하게 방어선을 준비해놨을 것이다

작전준비에만 인천 때의 2배 이상의 규모와 시간이 필요하며 상륙전개 시, 노르망디를 웃도는 피해가 예상된다.

 

3. 전선이 너무 이북으로 올라가면 이번에는 위협을 느낀 소련군이 참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유엔군은 1950년의 교훈으로 중공군의 전력과 작전역량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미국은 전쟁을 빨리 매듭짓고 빠지고 싶었으므로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밴플리트의 계획은 전부 퇴짜를 맞았고, 이후 그는 다시는 이런 작전을 입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엔군 측의 바램과 달리, 끝날거라고 여겨졌던 휴전협상은

한 치라도 양보를 하기 싫었던 양측의 주장 때문에 2년을 넘게 질질 끌었다

미국이 두려워했던 공산측의 확전 역시 기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중공군은 전쟁 초반 유엔군을 경기도까지 밀어붙였던 것과 1951년 춘계 대공세로

유엔군 방어선에 엄청난 돌파구를 만드는 등 매우 막강한 적수였다

하지만 이들 역시 유엔군 측의 항공우세와 인력에 의존하는 보급 때문에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공은 북한이 땅을 더 빼앗기더라도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의 완충지대만 확보된다면

적당히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어했다.

 

소련을 자극할거라는 우려 역시 기우였다

스탈린은 2차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국토를 재건하느라 극소수의 공군력을 빼면 한국전쟁에 뛰어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만약 참전했다면 소련은 진짜로 망했을 것이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만약 맹조의 발톱 작전이 받아들여졌더라면

오히려 휴전은 더 빨리 맺어 졌을 수도 있었다

멀리 나아가서, 쓸만한 영토 상당수를 잃은 북한은 한국에게 체급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동독처럼 붕괴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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