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3년 <아모리 : 보두앵 4세의 부왕>가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을 때 십자군 국가들은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통치자인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 : 누레딘>의 권력에 의해 위협을 받았고 그의 형제는 모술에서 이라크 북부를 통치하였다. 누레딘과 아모리는 카이로의 약하고 파벌로 분열된 파티마 왕조 칼리프를 통제하기 위해 서로 싸웠고, 1169년 초에 누레딘의 <시르쿠> 장군이 승리했다. 시르쿠가 두 달 후에 죽었을 때 그의 조카 <살라흐 앗 딘 : 살라딘>은 이집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지만 이론상 그는 파티마 왕조 칼리프의 고관에 불과했고 1169년 가을에 아모리가 동로마 해군의 지원을 받아 그를 권력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는 대실패였다. 십자군 국가의 상황은 단일하고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극도로 위험해졌다.
아모리와 그의 조언자들은 누레딘과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전에 대한 그의 헌신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알 아크사 모스크에 놓을 설교단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난 70년 동안의 프랑크인의 경험으로 인해 아모리는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비현실적으로 여겼고 거부했다. 강력한 무슬림 세력은 지속적으로 프랑크에게 적대적이었고 그 기간 동안 에데사를 잃었고, 안티오키아 영토의 절반을 빼앗겼으며, 트리폴리의 동부 구역은 침략 당했고 예루살렘 왕국의 방어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들이 무슬림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시리아 프랑크인은 통일된 무슬림 국가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며, 그 통치자는 자신의 결합된 자원을 사용하여 그들과 성전을 벌일 것이다.
아모리가 동맹국을 찾는 동안 누레딘은 프랑크 국경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시도했을 것으로 예상되었을 수 있다. 1164년 누레딘이 하림을 점령하면서 오론테스 강 북쪽에 있는 땅에 대한 안티오키아의 지배력이 상당히 약화되었다. 더 남쪽에 있는 프랑크군 방어의 가장 취약한 지점 중 하나는 베이루트 내륙으로, 에미르들이 상당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누레딘이 다마스쿠스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 자흐 알 두알라 카라마를 그곳의 에미르로 인정하고 1161년 그에게 상당한 규모의 이크타(iqta)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카라마가 1170년경 사망했을 때 베이루트에 있는 아모리 국왕의 총독은 에미르의 가장 나이 많은 아들 세 명을 그들을 살해한 잔치에 초대함으로써 그 문제를 무자비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처리했다. 그들의 7살 된 형제는 누레딘에게 피신하여 토후국에 대한 그의 주장을 유지했지만 그곳의 무슬림은 사실상 1187년 살라딘이 베이루트를 정복할 때까지 지도자 없이 남겨졌다.
1167년 누레딘의 군대가 남부 레바논의 프랑크 방어의 중심인 거대한 동굴 요새 티론과 트리폴리 국경 어딘가에 위치하며 성전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다른 동굴 요새를 점령하면서 시돈의 내륙 지역에 대한 프랑크의 지배력은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 그 이전인 1164년 누레딘은 프랑크로부터 바니아스를 점령했다. 그것은 헤르몬 산기슭의 요르단 동쪽에 위치했으며 다마스쿠스에서 갈릴리 상류까지의 주요 도로를 통제했다. 그 후 1167년 누레딘의 군대는 요르단 서쪽에 있는 중요한 샤스텔-뇌프 성을 파괴했는데 그들은 영토를 차지하지 않았지만 성은 10년 이상 재건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리타니 계곡과 요르단 상류를 분리하는 지역인 마르즈 우윤을 경유하여 프랑크 해안 지역에 대한 다마스쿠스의 공격이 가능해졌다.
한편, 1169년부터 1174년까지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1172년 그의 군대는 상-이집트에 대한 누비아의 공격을 몰아내고 아부심벨 바로 북쪽에 있는 이브림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이듬해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키레나이카를 합병하고 12년 동안 이곳을 장악한 모로코의 알모하드 칼리프로부터 트리폴리[상술한 십자군 트리폴리와는 다른 지역]를 탈환했다. 1174년 2월 살라딘의 형제는 예멘 원정을 이끌었는데, 5월 13일 그는 잘리드를 점령했고, 이후 사나와 아덴 항구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살라딘은 홍해와 무슬림 아프리카로부터의 순례자 왕래, 그리고 인도양을 건너 아덴으로 건너와 이집트 경제의 중요한 요소가 된 동양의 사치품과 향신료의 수익성 높은 무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171년 9월 살라딘은 이집트를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영적 복종으로 회복시켰고 이 칙령이 발표된 지 3일 후 파티마 왕조 칼리프가 사망했을 때 그는 후계자가 선포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파티마의 분열은 끝났고 살라딘은 자신이 충실한 수니파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계속해서 누레딘에 대한 모든 외적인 존경의 표시를 보였지만, 1171년 누레딘으로부터 그와 힘을 합쳐 케라크와 몽레알의 프랑크 요새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비록 기술적으로 소환에 불복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들의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이집트로 퇴각하였다. 살라딘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가 누레딘이 울트레주르뎅을 공격하는 데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완전히 기발한 것이 아니었다. 누레딘은 살라딘을 더 충성스러운 대리인으로 대체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집트로 보낼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누레딘과 살라딘 사이의 이러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아모리는 살라딘의 권력 성장에 안주할 수 없었으며 1173-4년 겨울에 반체제 이집트 시아파 집단이 그에게 접근했을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친-파티마 왕조 반란은 그가 이집트에 대한 공동 공격을 위해 시칠리아 국왕 구기에르무 2세와 함께 계획하고 있던 군사 활동과 특히 잘 맞물릴 것이다. 살라딘의 일부 고위 관리들은 일부 이집트 학자들과 함께 술탄을 전복하고 파티마 왕조 칼리프 체제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살라딘은 마지막 칼리프의 친족들을 모든 정치권력에서 박탈했지만 살아있게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아모리는 살라딘에게 공식 사절을 보냈고 그 중 한 명은 카이로의 반군 지도자들과 접촉하도록 지시 받았다. 살라딘은 좋은 첩자 연결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그의 요원들이 그에게 그 계획을 알려주었고, 그래서 그는 이중 첩자를 사용하여 이에 대응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살라딘의 명령에 따라 이집트 반체제 인사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대의에 동조한다고 공언한 콥트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다음 살라딘은 그를 공식 대표로 프랑크 사절단의 참모에 배치했고 그는 아모리의 대리인과 그가 직접 참석하고 술탄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이집트 반군 사이의 비밀회의를 주선했다. 살라딘은 프랑크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지만 사절들이 떠나자마자 공모자들을 체포했고 1174년 4월 6일에 처형하였다. 그는 또한 파티마 왕조의 남성 구성원을 그들의 궁전 구역에서 더 엄격한 감시 하에 두어 반체제적인 시아파 집단의 지도력을 박탈하기를 희망하였다.
시아파 음모의 붕괴는 계획된 프랑크-시칠리아 공격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소식이 동로마의 마누일 1세 황제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그것에 대해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시칠리아와 동로마 사이의 관계는 노르만인이 이탈리아 남부에 처음 정착한 이후로 험난했지만, 1158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두 세력 사이에 가해진 위협, 그러니까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이탈리아 야망에 대해 공동전선을 제시할 수 있도록 30년간의 휴전을 협상하였다. 그 휴전은 1174년에도 여전히 유효했지만 마누일이 그의 딸 마리아를 구기에르무 2세와 약혼시킨 후, 젊은 국왕에게 그녀의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굴욕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최근에 심각한 긴장 상태에 놓였다. 바르바로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구기에르무는 이러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마누일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불안한 평화였으며 프리드리히 1세가 시칠리아 이익을 위협하는 것을 중단하더라도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따라서 마누일은 시칠리아 국왕이 지중해 동부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플에 구기에르무 2세의 이집트 공격 계획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마누일은 살라딘에게 이에 대해 경고했다. 물론 대규모 시칠리아 전쟁 함대의 집결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마누일의 경고가 없었다면 카이로 궁정은 그 목적지가 불확실했고 따라서 해상 침략에 대처할 준비가 덜 되었을 것이다.
1174년 5월 15일 누레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리아 국경에서 프랑크에 대한 압박이 사라졌다. 그의 후계자는 그의 11세 아들인 앗-살리흐였기 때문에 누레딘의 장군들과 섭정을 둘러싼 친척들 사이의 투쟁은 불가피해 보였다. 에미르들은 어린 군주에게 경의를 표했고 이븐 알-무카담은 앗-살리흐를 위한 장기 영토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거의 즉시 모술의 누레딘의 조카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장기 왕조의 땅을 모두 점령했다.
누레딘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아모리는 군대를 소집하여 1174년 6월 바니아스를 공격하였다. 왕국의 방어는 그곳의 회복으로 강화되었을 것이지만, 15일이 지나자 이븐 알-무카담은 포위 공격을 해제하면 프랑크 기사 20명을 석방하면서 배상금을 주겠다며 평화를 요구했고, 아모리는 몸이 아파서인지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아모리 국왕의 죽음은 그의 아버지와 형제의 죽음만큼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숙영하기 전에 국왕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했고 티베리아스에 도착했을 때 이질로 고통 받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그때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38세의 나이로 7월에 그곳에서 죽었다. 7월 11일의 그의 죽음은 누레딘의 제국이 붕괴되고 시칠리아의 개입이 예루살렘의 프랑크에게 이집트의 살라딘 정부를 십자군 국가에 더 유리한 정부로 대체할 실질적인 가능성을 제공했을 때 중요한 시기에 발생하였다.
[1174년 여름, 라틴 왕국의 국제적 상황은 특히 위급했다. 국왕이 정부에서 통일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시기에 미성년 국왕이 집권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국왕의 미성년은 1143년의 오직 보두앵 3세(보두앵 4세의 큰아버지) 때였는데, 그 때는 국왕의 어머니 멜리장드 여왕이 전에 남편 풀크 국왕과 함께 공동 지배자로 있었기 때문에 국정에 공백이 생기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국왕의 조언자들이 지침을 구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다. 1174년에는 누구도 같은 수준의 연속성을 제공할 수 없었다.]
[1174년 5월 15일, 서부 이슬람의 가장 거대한 통치자인 누레딘은 11세의 상속인을 남기고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친척과 장군들이 지배권을 놓고 싸우면서 그의 지배권은 파벌에 의해 분열되었다. 7월 11일, 예루살렘의 아모리 국왕이 이질로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13세 된 아들이 4일 후에 <보두앵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보두앵은 한센병에 시달렸지만 1185년 죽을 때까지 국왕으로 남았으며, 그동안 이집트의 통치자 살라딘은 리비아 국경에서 이라크 북부에 이르는 제국을 다스릴 때까지 누레딘의 이전 영토를 모두 장악했다. 마치 거대한 이슬람의 호두까기 인형이 라틴 왕국 예루살렘 주위를 도는 것과 같았다. 1187년 살라딘은 메커니즘을 가동하였다. 그는 갈릴리를 침공하고 7월 4일 하틴에서 프랑크군을 물리쳤으며 첫 번째 십자군 왕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하틴의 패배와 왕국의 상실은 역사가들의 생각 속에 보두앵 4세의 통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미래 프랑크인들의 약화의 씨앗을 품고 살라딘의 승리를 도운 통치의 측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공유했을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병왕의 신하들은 자신들이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인식했지만 패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보두앵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지도 아래 그들은 약 6년 동안 누레딘의 제국을 장악하고 십자군 국가를 포위하려는 살라딘의 계획을 좌절시켰으나 프랑크인의 영토에 대한 살라딘의 직접적인 공격은 대부분 효과가 없었다. 그는 1177년 몽기사르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했고 1182년 르 포빌렛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그의 새로 편성된 해군은 프랑크인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그가 육해의 합동 작전으로 베이루트를 점령하려 했을 때 격퇴되었다. 그는 케라크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지만 두 번이나 점령에 실패했다. 1179년 바니아스 숲과 마르즈 우윤에서 거둔 승리는 우연이었으며, 그런 이유로 후속 승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보두앵 4세의 프랑크인을 상대로 거둔 단지 중요한 성공은 1179년 르 샤스텔레를 점령하고 파괴한 것과 1182년 르노 공작의 함대를 격파한 것이었으며, 이 두 번의 승리로 인해 프랑크인은 영토를 잃지는 않았다.]
[참고문헌]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 Baldwin IV and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https://books.google.co.kr/books?id=IySQoHdviNkC&dq=baldwin+iv&hl=ko&source=gbs_navlinks_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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