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보

625 전쟁 초기, 북한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 춘천 전투

by 프레임 2023. 3. 12.
728x90
반응형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시작함.

 

 

 

 

북한은 다음날 26일 서울 방어 핵심지였던 의정부를 돌파하고, 무려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함

 

 

 

 



사실상 수도 방어전 과정에서 국군의 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북한은 하루 최고속도 25km를 진격해서 3일만에 조치원, 6일만에 대전까지 점령할 수 있었음.

 

실제로 김일성의 초기 계획은 미국이 대응도 못하도록 한 달 동안 남한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북한은 그러지 않았음. 갑자기 서울에서 3일동안 진격을 멈춰버림.

 

 

 

 



북한이 3일간 진격을 멈춘 덕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국군은 재정비한 뒤

 

지연전을 통해 시간을 조금씩 번 덕분에 남한의 조기 궤멸을 막을 수 있었음

 

 

반응형

 



미군 사령부의 보고서엔 김일성이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기까지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함.

또한 김일성도 훗날 '서울에서 3일에 엎어져 있지 않았다면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을텐데'라며 엄청 아쉬워했음.


그럼 대체 북한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도하를 하지 않고 머물렀을까?

 

 

 

 



첫번째 추측으로는 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무기를 도하 할 수 없지 않았을까?

 

당시 국군이 파괴했던 한강 다리는 광진교, 인도교 밖에 없었음. 충분히 도하 할 수 있는 다른 다리가 존재했으며

 

또 일부 폭파 시도한 한강 다리 중에서 한강 철교는 침목과 철로만 약간 손상되어 있을 뿐 거의 멀쩡했기 때문에

다리가 없어서 북한군이 병력과 장비를 도하 할 수 없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부족함.

 

 

 

 



두번째 추측으로 북한에는 서울 제한 점령론이 있었음.

 

북한의 수뇌부 일각에선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과 남한 지하세력들이 호응해서 내부분열로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봤음.

 

실제로 김일성도 이 부분에 대해선 어느정도 수긍을 했었음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빨치산 소탕작전 등을 통해 기대를 접게 됨.

 

 

 

 



무엇보다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문서들 중에서 한강을 점령하면 곧바로 도하하고 진격하라는 훈시가 있었다고 함.

 

따라서 북한은 애초에 서울에 머무를 계획이 아니었음.

 

그럼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소련은 미군이 전쟁에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신속하게 끝내야만 한다고 김일성에게 강력하게 주장했음

 

따라서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선제타격작전도'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 작전도를 토대로 총 3단계로 계획을 나눠 한달 안으로 남한을 점령할 계획이었음.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1단계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인데.

 

수도 방어선을 뚫고 주력 국군을 궤멸시키기만 하면 잔여병력들은 손쉽게 섬멸하여

남해안까지 금방 점령이 가능하다고 봤음.

 

 

 

 



그런데 이 1단계에서 문제가 생겨버림.

 

북한군 2사단은 중부 전선에 위치한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일제히 섬멸하려는 계획이었음.

 

당시 북한군 2사단은 그정도로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만큼 정예군으로 선발되었음.

 

즉, 2사단도 원래라면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된 것처럼 수원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어야 했음.

 

 

 

 



그런데 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이 모진교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옥산포로 즉시 출동해서 진격해오는 북한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했던 것.

 

 

 

 



심지어 이 국군 6사단 7연대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한달 전에

 

온통 보리밭이었던 우두산에 미리 참호를 파면서까지 대비를 해놨던 거임.

 

 

 

 



그렇게 2일간 옥산포를 지키던 국군은 포위를 피해 소양교로 옮겨서 방어전을 재개하는데

 

이 소양교는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위치인 만큼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남.

 

 

 

 



이 전투에서는 국군 포병들이 엄청나게 활약하여 북한군 포로 심문서에 두려움과 피해가 막심했다고 적혀있을 정도

 

 

 



국군 6사단의 초동대응 덕분에 
춘천 점령을 무려 3일이나 지연시켰고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하고 수원으로 내려간다는 첫번째 계획부터 무산되어 버림.

 

 

 

 



이렇게 북한군 2사단이 춘천에서 고전하고 있을때, 북한군 12사단도 홍천을 점령하고 2사단을 돕고자 합류하려 했는데

 

이 12사단에도 말고개에서 문제가 생겨버림.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던 6사단 2연대가 이 말고개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해놓고 있었던 거임.

 

 

 

 

 



교육을 받던 중 전쟁이 발발하여 곧바로 복귀한 연대장은

 

당시 말고개의 좁은 산길을 통해 내려오는 북한군의 T-34를 저지하고자

11인의 육탄돌격대를 결성하고 병사들과 결사항쟁을 벌임.

 

 

 

 






당시 육탄돌격대의 임무는 좁은 산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북한군의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뛰어내리는 것이었음.

 

6사단 2연대는 대전차포의 지원을 받으며 수류탄으로 북한군 탱크 10여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올림.

 

이런 국군의 희생 덕분에 좁은 산길에서 탱크가 퍼져버리니까 12사단도 28일까지 진격하지 못했음.

 

 

 

 



김일성이 얼마나 빡쳤으면 당시 춘천 전투 총책임자였던 북한군의 2군단장과 2사단장, 12사단장을 모조리 교체해버림.

 

이 춘천 전투의 성공적인 방어 덕분에 수도 방어에 실패해 후퇴하던 국군은 전멸을 막을 수 있었고

 

8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을 막아냄으로써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에 성공하게 됨.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