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하는 장 2세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백년전쟁의 한 전투로 발생한 푸아티에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의 왕이었던 장 2세는 포로가 되었다.
※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프랑스에게 경제적으로도 결정적인 참패였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왕의 몸값으로 나라 전체의 1년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장 2세의 포로로서의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접대를 받는 장 2세
승리자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흑태자(잉글랜드의 태자 에드워드의 별칭)는 포로가 된 장 2세를 정중히 맞이했고 그가 갑옷을 벗는 것을 도운 다음 다른 귀족들과 함께 성대한 만찬을 제공했다. 에드워드는 직접 장 2세의 식탁에 음식을 가져다주며 극진히 대했다. 이후 에드워드는 포로가 된 장 2세와 함께 런던으로 향하였고, 장 2세에게 짐수레용 말인 해크니를 타게 한 것에 대한 사죄금까지 지불하였다.
잉글랜드의 포로로서, 장은 왕실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왕국을 지키기 위해 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가 감금된 동안 그의 회계 장부를 보면 점성술사와 궁정 악대를 유지하면서 말과 애완동물, 옷을 구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장 2세는 자신의 아들 앙주의 루이를 대신 포로로 맡기고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풀려나는 데 성공하나, 루이가 탈출하기에 이르자, 자신이 다시 포로가 되어 잉글랜드로 향했다. 선의와 명예를 그 이유로 제시했지만, 이외에도 몸값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프랑스 재정이 악화되어 있었던 점도 있었다. 따라서 1360년의 브레티니 화약(The Treaty of Brétigny)에서 책정된 자신의 몸값인 300만 크라운이 프랑스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 석방을 원하지 않았고 흑태자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런던에서 지내다가 1364년 그곳에서 죽었다. 프랑스 왕위는 아들 샤를(샤를 5세)이 이었다.
※ 십수명의 기사들에게 옷을 같이 입혀 눈을 속이는 작전을 펼쳤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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