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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추위가 전쟁에 끼친 영향

by 프레임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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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완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명령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 외의 침공 규모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리며 전선은 한반도 북부까지 밀리게 된다
 
 
 
 
1592년 7월부터 12월에 걸쳐 명나라도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전쟁은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여송이 이끄는 40,000명의 명군은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하고 개성까지 수복하지만
 
서울 부근 벽제관 전투에서 참패를 겪고 전선은 고착화된다
 
 
이때 명군과 일본군은 한반도의 기록적인 추위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명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송응창은 자신의 저서에 명군이 겪은 한반도의 추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상황은 일본군이라고 해서 결코 좋지 않았다
 

일본군은 조선 침공을 위해 많은 군량미와 장구류를 준비했지만
 
대다수는 조선의 열악한 육로 사정으로 인해 제대로 운송되지 못했다
 
수로는 다들 알다시피 이순신이 버티고 있어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맞은 한반도의 겨울은 매우 처참했다
 
임진왜란 참전 일본군은 대부분 규슈, 시고쿠, 주고쿠 같은 남서쪽 지방 출신이 많았다
 
(이 당시 홋카이도 같은 일본 북부지방은 아이누족이 살았고 정식 편입되기도 전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출전 당시 보급받았던 여름 옷으로 겨울을 맞아야 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당시 함경도 점령을 시도했던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제2군은
 
보급부족과 함경도의 강추위로 인해 북관대첩 등 패배를 경험하고 후퇴해야 했다
 
 


1593년 2월 27일, 참다 못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서울에 모여
 
앞으로의 전쟁 대전략에 대해 회의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장교부터 병사까지 죄다 염전사상이 급속히 번져 있었다
 
 
최전방에서 여름옷 한벌로 3개월 혹한기를 버텼으니 오죽할까
 
 
물론 일본군이라고 월동준비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열악한 도로사정과 보급문제가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결국 현장 지휘관들은 더이상의 북진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해안으로 후퇴한 다음 전열을 재정비해서
 
차근차근 다시 제해권부터 확보해 나가자는 취지의 편지를 히데요시에게 보낸다
 
 
 
명나라 역시 한반도의 강추위에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고
 
기병 위주의 편제였기 때문에 보급문제와 지형상의 불리함을 깨달은건 명군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심유경을 보내 일본측에게 화의를 제의했고 종전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겨울 1번이 두 외국군대의 전쟁의지를 꺾어놓은 것이다
 
 
 
 
재밌는 것은 400여년이 지난 1950년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은 전쟁을 벌여 남한을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이후의 전개는 다들 알다시피 유엔 결의가 통과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파견되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뒤집어 북진을 시작한다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지만
 
늘어진 보급선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밀리기 시작한다
 
 
이 때 한반도의 강추위가 다시 한번 미군과 중공군을 찾아오게 된다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벌어진 장진호 전투는
 
현재까지도 미군이 경험한 가장 추운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세세한 묘사는 다른 자료에서도 언급되지만
 
공통적으로 미국과 중국 모두 말도 안되는 추위에
 
전투불능 병력과 동사자가 속출했다
 
 
보급은 유엔군이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기록적인 추위에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월동 준비를 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과 원활하지 못한 보급은 발목을 잡았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보급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항공 수송으로 겨우 이를 극복해나간건 유명하다
 
(박격포탄을 수송해달라고 했는데 '투시롤'이라는 은어로 말하는 바람에
진짜 투시롤 사탕이 보급된 일화도 유명)
 
하지만 항공 수송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고
 
애초에 유엔군(의 대부분이었던 미군)이 '전쟁'을 미리 준비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류나 탄약을 제외한 월동장구 같은 것에 대한 대비는 미비했다


 
 
상황은 중공군이라고 해서 전혀 다르지 않았다
 
 
 
중국측 기록에도 많은 동사자가 속출했다고 적고 있으며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보급 능력이 미군보다 나았을 거라고 여겨지진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항공전력이라도 있었지만 중국은 그런게 미비했다)
 
더 심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이 전투를 겪고난 뒤부터 '휴전'이란 카드를 양국가 모두 고려하게 된다
 
 
이후 유엔군 서울 재탈환과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등이 이어지면서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근처로 교착화되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51년 7월부터 본격적인 휴전 회담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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