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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서 그야말로 대단했던 전성기 시절의 원소

by 프레임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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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대단한 명문가인 원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노비' 였다.

과거에는 '정실' 소속의 자식들이 있고,

양인 출신의 '첩' 과 결혼하면 여기서 나온 자식이 '서자' 다.

만약 일반적인 서자였다면 정실 소속의 자식들에 비해 집안 대소사에서 우선순위는 밀리지언정

본인의 출세에 크게 제약까지 걸리진 않았겠지만

원소의 어머니는 한마디로 그냥 종년이었다.

이런 노비 출신의 첩과 사이에서 나온 것은 얼자(孼子)라고 불렸고

원소는 제대로 된 부부관계가 아니라 성욕용 노리개와의 사이에서 나온 부산물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원술은 공손찬에게 여러차례 서신을 보내면서

"원소 놈은 원씨도 아니다" 라는 비하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원소는 기본적인 용모에서부터 대단히 잘생기고 사람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있었고,

여기에 더불어 본인도 몸가짐이 단정하고 위엄과 예절이 모두 넘쳐

주변인들에게 "인물은 인물이다" 같은 식으로 평가 받으며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이 일찍부터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 원술이 어머니인, 자기에게는 낳아준 부모는 아니짐나 적모(嫡母)가 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20대의 나이에 3년상을 하더니,

곧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제사를 못지냈다는 아버지 원성의 삼년상까지 이어서하는

"6년"을 하면서 평판이 중요한 후한 사회에서 어마어마한 명성을 쌓았고,

그런 명성을 듣고 상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도 빈틈없이 깍듯한 태도를 취하는 통에

모든 사람들이 "원소가 인물은 인물이다" 라는 식으로 호평을 하며 되돌아가면서

명성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 되었다.

이윽고 동탁이 조정의 전권을 잡고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하며 황제까지 마음대로 바꾸려는 모습을 보인다.

"“황제는 어리고 어리석어 만세의 주인이 되지 못하오. 진류왕이 오히려 더 나으니 지금 그분을 옹립하고자 하오."

"지금의 황제가 비록 어리기는 하나 특별히 실정을 한 것도 없는데 어찌 바꾼다는 말입니까?"

“이 바보같은 아이야(豎子)!

(내가)천하의 일을 어찌 결정하지 못하겠는가?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그대는 이 동탁의 칼이 불리하다고 말하는가?”

그러자 원소는 칼을 꺼내들고 읍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천하에, 힘 있는 자가 어찌 동공 한 사람 뿐이겠소?"

천하의 동탁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수도를 빠져나온 원소의 명성은 당시에 전중국을 뒤흔들었다.

원소는 원래가 '탁류파' 원씨 가문의 소속이었는데

6년상을 하면서 '청류파' 의 지지도 등에 엎고 있었다.

동탁조차도 눈앞에서 본인에게 대항한 원소를 증오하면서도 내심 그 명성을 두려워해서

"발해태수" 직을 내리면서 회유하려고 시도했을 정도다.

그러나 결국 원소는 반동탁연합군을 일으켰고,

이에 격분한 동탁은 수도에 남은 원씨 일가를 모조리 학살한다.

이에 대한 동정론까지 더해져서 원소의 명성은 하늘 끝까지 치솟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토록 대단한 명성과는 별개로 당시 원소가 가진 실제 전력은 형편없었다.

원소는 거병 이후 낙양 지척의 하내까지 진군해서 당장이라도 동탁과 싸울듯한 태세를 취했지만

정작 제대로 교전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후방에 있던 "한복" 때문.

한복은 원소가 태수로 있던 발해를 관장하는 '기주목' 이었는데,

한복은 애초에 임명 자체가 동탁이 원소를 견제하라는 임무를 주고 임명한 사람이었다.

막상 동탁에 대한 여론이 극히 나빠지자 일단은 반동탁 연합군에 합류하긴 했는데,

또 그렇다고 원소가 너무 커지면 자기를 위협할까 두려워서 간잽이 행보를 취하게 된다.

"본초형, 내가 전투는 잘 못하니 뒤에서 군량이나 대줄테니 싸우는건 본초형이 하시구려."

"군량만 주면 문제 없지"

"그렇게 말해놓고 군량 안줘버리기~"

한복은 동탁과 싸우는 전면에는 원소를 내보내고 본인은 후방에 남으면서

동시에 원소에게 보내는 군량은 일부러 계속 줄여서

손 하나 안대고 원소군을 흩어지게 만들어버리는 방법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니 진군해서 동탁과 싸울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복이 저렇게까지 불온하게 나오는데 약소한 세력을 이끌고 발해로 되돌아갈수도 없는

진퇴양난 상태에서 원소세력은 처참하게 쪼들리게 된다.

영웅기 中 "(원소왈)기주는 강성한데, 나의 병사들은 굶주리고 궁핍하니……"

후한서 中 "(저수왈)원소는 의지할데 없는 객장이오, 곤궁한 병사들뿐이라, 우리가 내쉬는 숨이나 바라고 있으니 비유컨데 아기가 품 속에 있는데 젖을 먹이지 않으면 바로 굶어죽는것과 같사옵니다."

의지할데 없는 객장소리까지 듣던 당시 원소의 비참한 처치.

"요새 힘들다고 들었는데..."

"당신 누구요?"

"나 국의라는 사람인데, 저 변경 양주에서 강족들하고 오랫동안 싸워봐서 이민족이나 기병 때려잡는건 스페셜리스트인 사람이지.

한복 밑에 있었다가 마음에 안들어서 반란 일으켰는데 세력이 작아서 힘든 상황이라...

그쪽도 한복에 원한이 깊은것 같은데 우리 손을 잡아보면 어떤지?"

"사정 들어보니 그쪽하고 손을 잡으면 한복하고 바로 싸우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나 다름 없긴 한데...

지금은 별 대안도 없으니 그렇게 합시다."

"잠시만, 원소님. 저 측근 봉기 입니다.

한복과 싸울 생각이시라면 이대로 그냥 싸우는것보단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라니?"

"바로 공손찬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공손찬? 그 무시무시한 놈을?"

당시 공손찬은 자신의 정예 기병대, 백마의종(白馬義從)을 이끌고

이민족들을 개처럼 떄려잡고 사냥하고 다니던 인물로

그 거친 이민족들이 공손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려서 두려워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변방의 이민족들을 짓밞고 다니던지라

다른 군웅들의 어중이 떠중이 수준, 갈 곳 없는 유민들에게 창 한자루 주고 부려먹는 군대하고는

전력면에서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강력한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고,

공손찬 본인도 휘하 기병 수십명을 데리고 순찰을 하다가

선비족 기병대 수백명에게 포위 되어도

마상창술을 쓰면서 혼자서 수십명을 때려죽이고 포위망을 뚫고 돌파하는

말도 안되는 괴물이었다.

“무릇 거사를 일으킴에 있어, 한 주에 근거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 기주는 강하고 충실하나 한복은 용렬한 자이니,

은밀히 공손찬과 약조하여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하면

한복은 이 소문을 듣고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아울러 말 잘하는 선비를 보내어 한복에게 어떻게 하면 화가 되고 어떻게 하면 복이 될 것인가 설명을 늘어놓게 하면,

한복은 창졸간에 궁박해져서 반드시 그 지위를 장군께 양도하게 될 것입니다.” - 후한서 원소전

이렇게 되서 공손찬은 "내가 악적 동탁을 치러가려고 하는데 길을 빌려달라" 는 명분으로 남하를 시작했고

반대편에서는 원소 역시 국의와 함께 북상하며 어부라, 장양 등의 도적떼를 물리치고 그 부대를 흡수하며

북상을 시작해왔다.

양쪽에서 군단이 몰려오니 한복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당시 한복의 세력이 약했던 것은 아니다.

하양(河陽)에 주둔해놓은 강노부대만 1만명에, 전선 수백척을 거느린게 한복의 세력이었다.

당장 북상하던 원소는 자신의 부대옆을 지나가는 한복의 전선 수백척을 보고(한복군도 귀환하는게 급해서 싸움은 안남)

초조하기도 해서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때문에 한복의 부하였던 경무와 민순(연의에서 나관중이 이름을 착각해서 관순이라고 해서 영걸전에도 관순으로 나옴) 등은

"우리 세력도 충분히 강한데 싸울 수 있다" 고 주장했다.

"원본초의 군대는 식량이 없고 흩어져 있습니다.

비록 장양과 어부라의 병력을 새롭게 귀부시켰다곤 해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인즉

우리의 상대가 아닙니다. 직접 병사를 살피시고 막으면 단 열흘이면 저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원소는 기술을 건다.

"저쪽에서 주전론자들이 있을텐데,

여기서 한복을 치면 바로 군사대결로 사생결단 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차라리 좀 더 겁을 주는 동시에 동앗줄을 내밀면 한복도 정신을 못 차리겠지."

원소는 그런 판단으로 자신의 수하인 "순심" 등을 한복에게 파견한다.

"원소의 부하놈이 여기는 무슨 일이냐?"

"드릴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말을?"

"저 공손찬이 승세를 타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군이 여기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원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으니, 현재의 장군은 실로 위험한 상황입니다.

공손찬은 연,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 예봉은 도무지 당해낼 수 없습니다.

원씨는 본래 장군의 옛 친구요, 동맹을 맺었으니 장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기주를 들어 원씨에게 양보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원씨가 기주를 얻게 되면, 공손찬은 (원소와) 능히 더불어 싸우지 못하고, 필히 장군을 후덕하게 대우해 줄 것입니다.

기주를 친한 벗에게 맡기면 이로써장군은 현명하게 양보했다는 명성을 가지게 되고,

자신은 태산(泰山)에서 편안하게 있게 됩니다.

원컨대 장군께선 의심치 마소서."

이에 경무, 민순, 저수 등의 한복 측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기주의 군사가 백만이고, 곡식은 10년을 지탱할 수 있다.

원소 따위는 외로운 빈객이며 군사는 궁색해서 바로 굶겨 죽일 수 있다. 절대 항복하면 안된다!"

"하지만...그래도 공손찬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는데..."

한복은 공손찬과 사이가 나쁜 인물인 "유우" 를 황제로 추대하는 등의 행동을 한 적이 있어서

공손찬과는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다고 보긴 어려웠고, 오히려 공손찬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가능성이 높았다.

겁에 질린 한복은 변경의 야만스런 공손찬보다는 명망 높은 원소가 그나마 자기 목숨은 챙겨줄라고 생각했는지

결국 원소에게 항복한다.

(후한수 군국지 기준 서기 140년의 인구 조사 기록. 현재 글에서 다루는 시기는 191년경)

이로서 원소는 인구수 593만에 달하는 기주를

맨바닥에서 시작해서 제대로 된 전면전 하나 없이 오직 외교적 술수와 심리전을 이용한 "계책" 만으로 꿀꺽하며

삽시간에 강력한 군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최강의 군단을 거느린 공손찬이었다.

공손찬은 가로막는 한복군 잔당들을 개미처럼 찍어누르면서 파죽지세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원소가 기주를 점거하자

미리 약속해놓은 것이라도 있었는지 잠시 진군을 멈추게 된다.

"원소 이 새끼야, 기주 내놔라!"

"변경에서 이민족들을 개잡듯 때려잡던 기병대가

농꾼 출신들 보병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무섭다...두렵다.."

여러 매체에서 묘사되는것과 달리

원소와 공손찬의 이 첫접점에서 원소는 공손찬을 크게 두려워하며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발해태수 직을 공손찬에게 내주면서

바짝 엎드렸다.

그러나 이미 야욕에 잔뜩 불타 있던 공손찬에겐 크게 소용은 없었다.

이때 황건적의 세력이 강하던 청주를 비롯한 서주의 황건적들이

하북에 있던 '흑산적' 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해오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황건적의 숫자가 무려 총 30만명.

발해군 근처까지 황건적이 도달하자, 여기에 있던 공손찬은 일단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공손찬은 발해군 동광(東光) 지역에서 보병과 기병 2만명을 주둔시키고

발해군 경계로 진입해오는 황건적 30만과 정면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북방 이민족들을 짓밞으며 경험을 쌓던 잔인하고 난폭한 천하최강의 백마의종 기병부대 앞에

농민 출신 유민들 따위는 숫자가 10만이건 30만이건 크게 의미가 없었고

30만 황건적은 지푸라기보다 못한 수준으로 짓밞혔다.

 

"자, 이제 기주를 차지하러 가자!"

"공손찬이 청주의 황건적으로 쳐서 크게 격파하고, 돌아와 황종(黃宗)에 주둔하며, 그 군수와 현령을 바꾸니, 기주의 장리(長吏)들 중 그 풍모를 바라보면 호응하지 않는 것이 없어, 성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 영웅기

불과 2만명으로 30만을 짓밞은 공손찬은

직후 휘하 측근인 엄강을 기주 자사로, 전해를 청주 자사로, 선경을 연주 자사로 삼고

각 군현의 관리를 배치한 후,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포고문을 조정에 보내고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아직 자신의 손에 있지도 않은 지역의 관리를 배치했다는 것은 이 지역을 자기가 곧 얻겠다는 것인데,

기세를 몰아 진군하면서 한꺼번에 이렇게 배치한것은 말 그대로 천하를 삼킬듯한 기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의 공손찬은 틀림없이 전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나이였을 것이다.

"전력도 압도적으로 열세고,

기세에서도 이미 수 많은 군현 관리들이 성문을 열고 공손찬을 맞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 최대한 전력을 긁어 모아서 맞상대 해야겠다."

다가오는 공손찬을 상대하기 위해

원소 역시 필사적으로 전력을 끌어모아 수만의 부대를 만들었고,

양군은 계교(界橋)에서 만나게 되었다.

영걸전에서는 압도적인 원소군이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전개지만

실제로는 전혀 반대

"공손찬의 보병 3만여 명이 방진(方陳)을 이루었고,

기병이 양 날개가 되어 좌우 각각 5천여 필이었으며,

백마의종(白馬義宗)은 중견(中堅)이 되어서 또 두개의 부대(校)로 나누어서,

좌교는 우측에 쏘고 우교는 좌측에 쏘아대었으며,

깃발과 갑옷이 천지를 빛나게 비추었다"

계교전투에서 공손찬은 보병 3만에

기병만 무려 1만명으로 총 4만의 부대를 이끌었다.

이 기병대는 북방에서 이민족을 숱하게 때려잡은 정예군이었으며,

군단의 선두에는 이런 기병대 중에서도 가장 최정예인 전중국 최강의 군단 "백마의종" 이 선봉에 서 있었다.

사서에서는 당시 공손찬군의 기세에 대해

"깃발과 갑옷이 천지를 빛나게 비출 정도" 라고 하며, 그 정예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맞서 원소는 수만명을 동원하긴 했으나 대부분 긁어 모은 보병집단으로 전력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대신 선봉에는 국의가 데려온, 강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던 800 정예병이 앞에서 있었다.

"원소놈 군대 숫자를 보니 별것도 아니구만. 기병대 돌격으로 단숨에 끝장을 내버리자, 돌격!"

"내가 강족하고 많이 싸워서 보병으로 기병대 상대하는건 스페셜리스트지.

국의 부대는 전부 방패를 앞세우고 방진 구성!

명령 내리기 전까지는 숨소리도 내지말고 움직이지 말라!"

국의의 지시에 따라 국의군단은 익숙하게 방패를 앞세우고 그 뒤로 숨어든다.

공손찬의 선봉대를 이끌던 장수, 엄강

"저놈들이 완전히 겁먹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구나! 짓밞아버려라!"

"아직 멀었습니까? 놈들이 이제 코앞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조금...조금...조금 더...

지금이다!"

"모두 돌격!"

"뭐..뭐냐?! 으아악!"

"전술대로다! 측면 강노부대도 협공하라!"

원소가 국의(麴義)에게 영을 내려 팔백명을 이끌고 선봉에 서고,

강노(强弩)부대 1천명은 양옆에 끼고 뒤를 잇고, 원소 자신은 보병 수만명으로 후위에서 진을 형성했다.

국의는 오랫동안 양주(凉州)에 있어서, 강(羌)족의 방식에 대해 잘 익혔기에,

그 병사들은 모두 다 효예(驍銳-용맹하고 정예함)하였다.

공손찬이 그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바로 기병을 보내 그들을 짓밟고자 했다.

국의의 병사들이 모두 방패 아래 숨고는 움직이지 않다가,

채 수십 보에 이르지 않은 거리까지 이르자 이내 동시에 다함께 일어나,

먼지를 휘날리며 크게 소리치고 곧장 앞으로 돌진하고,

강노가 우레처럼 발사되니 맞은 자는 다 쓰러졌다.

적진에 임하여 공손찬이 맡긴 기주자사 엄강(嚴綱)의 갑병(甲兵)의 목 천여 급을 베었다. -정사 삼국지 원소전

기세좋게 돌격하던 공손찬의 기병대는

국의 부대에게 1차로 저지당하고,

그틈을 노려 원소군의 강노부대가 측면에서 협공을 하자 추풍낙엽처럼 고꾸라졌다.

엄강이 이끌던 천여명의 군대가 엄강 본인과 함께 순식간에 참살 당했고,

기세를 몰아 800명의 국의 부대는 공손찬의 수만 대군을 그대로 정면으로 돌파 시도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냐?"

"돌격, 계속 돌격!"

국의 부대는 미친듯이 공손찬군 부대를 돌파하며 갈라버리면서,

급기야 공손찬의 진영까지 도달해 부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깃발,

깃발이 내걸린 문인 아문(牙門)을 뽑아버렸다.

원소군의 본대 역시 그 뒤를 따라 국의 부대가 갈라놓은 길로 계속 돌격했고,

여기까지 오자 공손찬군은 완전히 궤멸되서 도주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있었다.

공손찬군이 거의 궤멸 될 시점에서 원소군의 본대는 모조리 전선에 투입되어 무너지는 공손찬군을 때려잡고 있었다.

때문에 비교적 후방인 원소 주변에는 강노병 수십명, 극戟을 든 병사 수십명 밖에 없던 상태였다.

그런데 초전에서 패배해 흩어졌던 공손찬의 기병대 2천명이

뒤늦게나마 다시 수습해서 전선에 돌아오면서

후방에 있던 원소가 갑자기 불과 수십명으로 2천여명에 포위된 상태가 된 것이다.

2천명의 기병대는 화살을 비오듯 쏘며 압박해 왔다.

전풍

"원소님, 이대로 가다간 큰일나겠습니다! 일단 급한대로 담벽 밑으로 들어가서 숨어 계시지요!"

전풍은 숫제 원소를 붙들고 담벼락 밑으로 끌고가려고 했지만,

원소는 오히려 분기탱천해서 전풍을 뿌리치고,

쓰고 있던 두무兜鍪까지 땅에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대장부가 적 앞에 죽게 되어 담장 틈으로 들어왔으니,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는가!"

두무는 투구라는 말도 되지만 관이나 두건 등의 뜻도 있다.

원소는 전장터에서 투구를 쓰지 않았다는 다른 기록도 있어서

이 말대로라면 원소는 선비가 쓰는 관까지 내던지고 완전히 산발이 된채로 이글거렸다는 말이 된다.

원소는 전선 한복판에서 불과 수십명의 강노부대를 독려하며 미친듯이 화살을 쏘아댇고,

기세가 너무 완강하자 상대가 원소인지 몰랐던 공손찬 기병대는

다른쪽으로 물러나면서 원소는 2천 기병대를 상대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계교 전투는 원소군으로서 조차도 믿기도 힘들 정도로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공손찬의 세력 자체는 강대한 상태였다.

이후 원소가 보낸 장군 최거업崔巨業을 공손찬이 격파하는가 하면,

용주(龍湊)에서 원소가 공손찬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양군은 일진일퇴 하게 된다.

그 상태에서 조정에서 사자가 와서 잠시 휴전을 권하자 양군은 일단 숨돌릴 기회로 여기고 휴전에 동의하게 된다.

힘들었던 공손찬과의 싸움도 어느정도 일단락 되자

원소군의 일행은 박락진(薄落津)이라는 곳에 모이게 된다.

여기서 원소군의 여러 장수들과 빈객들은 간만에 긴장을 풀고 크게 웃고 떠들면서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한창 즐기던 이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10만명이나 되는 흑산적이 원소 세력의 본거지인 '업성' 을 함락시키고 태수 율성(栗成)을 잡아 죽였다는 것.

흑산적 두목 장연

흑산적은 황건적하고 별개로 황하 이북에서 세력을 떨치던 도적들로,

흑산적 두령 한 사람당 휘하에 거느린 사람이 2만 ~ 3만 수준이었고

그 두령들 다 합치면 세력에 백만 정도 되었다고 하는 대세력이었다.

아직 한나라가 무너지기전인 영제 시절에도 사실상 조정에서 토벌 불가능으로 인정하여

도적떼들에게 자치권을 주고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했을 정도다.

"아이고, 우리 가족들은 어떡하나...

이젠 망했네, 아이고..."

연회에 모인 원소군 빈객 대다수는 가족이나 인척이 업성에 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도적의 손에 업이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자

모두 가족 걱정에 정신을 못 차리고 두려워하고 평정심을 잃었고,

심한 경우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통곡을 했지만

그러나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업성에 있고 심지어 업성이 자기 세력 기반이기까지 한

원소만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자약 했다.

3월 삼짇날[上巳], 박락진(薄落津)에서 빈객들과 크게 연회를 열었다.

이때 위군(魏郡)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흑산적 우독(于毒)등 수만명과 더불어 업성을 점령하고 군수를 살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앉아있던 빈객들 중에 집이 업성에 있던 자는 모두 근심스럽고 두려워 낯빛이 달라졌고

간혹 일어나 울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는데

원소는 얼굴이 태연자약하였고 평소의 모습을 잃지 아니하였다.- 후한서 원소전

홀로 정신 차리고 있던 원소는 패닉에 빠진 제장들을 추스리며 전열을 정비했고,

본거지가 날아간 상태에서 10만 흑산적과 교전하여 단 5일만에 업성을 다시 회복하고 적장 우독을 참살했다.

그리고 재차 연이어 교전하며 근처에 있던 수만 흑산적 역시 추가로 토벌해버렸다.

상황이 생각보다 쉽지 않자, 흑산적의 대두목 장연이 직접 나서게 된다.

장연은 흑산적 부대는 물론이고, 자신에게 있던 이민족과의 인맥을 이용해서

흉노, 오환의 지원까지 끌어왔다.

십수만의 흑산적 부대에 수천에 달하는 이민족 기병 전력이라는 압도적인 흑산적의 세력이

원소군을 향해서 맹공을 퍼붓게 된다.

그러자 원소는 당시 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여포' 를 임시로 고용하고

선봉대장처럼 써먹으며 대항했다.

여포가 '인중여포 마중적토' 소리를 들은것도 바로 이 무렵.

10일 동안 쉬지 않고 치열한 혈전이 펼쳐진 끝에 양군은 끝장을 내지 못하고 물러났는데,

원소는 본거지인 업성을 회복하고 지켰지만 장연은 얻은게 없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흑산적은

이 무렵부터 세력이 크게 쇠하기 시작한다.

흑산적을 물리친 원소는 곧 공손찬을 끝장내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 무렵 공손찬이 명망 높은 "유우"를 죽이는 일이 생기자

원소는 치밀하게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해서

유우의 죽음에 분개하는 여론을 자기쪽으로 끌여들이는데 성공했고

유우의 아들 유화,

유우의 휘하 관리들이었던 선우보,

그리고 이 선우보와 사이가 좋던 염유,

그런 염유가 관계가 깊던 오환족, 선비족,

유우에게 은혜를 입은 오환족 수령 소복연,

이 모든 세력을 한꺼번에 온갖 명분으로 자기 휘하로 끌어들이고

그 외에 국의의 부대 등까지 더하니

눈깜짝할 사이에 10만 대세력을 자기 휘하에 거느리게 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포구(鮑丘)에서 펼쳐진 실질적인 원소 vs 공손찬 최후의 전투에서

원소군은 공손찬군을 무려 2만명이나 참살했고,

이후로 공손찬은 싸울 의지를 모조리 상실한채 "역경루"에 틀어박히게 된다.

한때 이민족들을 때려잡던 패기로운 호걸이었던 공손찬은

원소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며 역경루에 은거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원씨의 공격은 마치 귀신과 같고,

운제 충차는 우리 군의 누각을 공격해대고, 큰북과 뿔피리는 온 땅을 울리고 있으며,

낮 밤 가리지 않고 공격해 들어와 한 마디 말할 틈도 없다. 새가 사람을 쪼아 먹고, 고인물이 산만큼 넘치는구나."

사람이 아닌 귀신과 같다는게 원소에 대한 공손찬의 평이었던것.

공손찬은 최후의 수단으로 흑산적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펼쳤다.

흑산적이 역경을 포위하는 원소의 뒤통수를 치면, 자기도 여기에 합세해서 양쪽에서 원소를 몰아내는것.

기세가 많이 무너졌던 장연도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킬 한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기에 호응해서 10만 흑산적을 어떻게든 긁어모아서 역경 근처에 도달했다.

그러나 원소는 철두철미하게 그것마저도 사전에 정보를 손에 넣어 적의 작전을 꿰고 있었고

오히려 이걸 역이용해서 공손찬과 장연 모두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마지막 남은 반격의 기회까지 사라지고 만다.

결국 백만 흑산적과 전중국 최강의 기병군단의 공손찬 모두

원소의 손에 요리되면서 하북 전체가 원소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아무런 물리적 기반도 없이 곤궁한 상태에서 시작한지 불과 9년만에 (191~199) 이룬 성과였다.

원소가 격파되어 달아나니 태조가 기뻐하여 선우보를 돌아보고 말했다,

“지난 해 본초(本初,원소)가 공손찬의 머리를 보내오니 나는 홀연(忽然,갑작스럽고 놀라움)해 했으나 이제 그를 이겼소.

이는 하늘의 뜻이며 또한 제군들(二三子)의 힘이오."

- 정사 삼국지 공손찬전

원소는 공손찬을 평정하고 그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는데,

조조는 훗날 원소를 물리친 후

"공손찬의 목을 보는 순간, 너무나도 놀랍고 또 두려웠다." 라고 솔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이건 정말로 하늘의 뜻이다." 라고도 했는데,

천하의 조조도 이건 정말 하늘이 도왔기에 자기가 원소를 이겼다는 생각을 했다는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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