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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왕/왕족/실세' 들의 유언

by 프레임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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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드디어 하늘이 나를 버렸다."

 

"왕공 (왕건) 이 벌써 승리를 얻었으니 내 일은 다 글렀다."

 

- 궁예 ( 857 ~ 918년 6월 14일 ) , 고려의 전신인 '후고구려, 마진, 태봉'의 유일한 군주

 

- 궁예의 장기간 폭정으로 민심,군심 그리고 핵심 지지층의 쿠데타로 현장을 빠져나온 궁예가 변장을 한채 '부양 산골현'으로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먹던 중, 폭정에 분노한 그 지역 백성에게 발각되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 위의 마지막 말은 쿠데타 소문을 듣고 도망치기전 한 말이다.

 

 

 

고려시대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 태조 왕건 ( 877년 1월 4일 ~ 943년 5월 29일 ) , 고려 제1대 황제

 

- 왕건을 죽기전 학사 '김악'에게 유조 ( 천자가 남기는 마지막 명령 )를 적게 했다. 이 유조를 다 불러 주고는 갑자기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신하들이 왕건이 세상을 뜬 줄 알고 오열하며,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신하와 백성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웃으며 말하기를, "뜬구름처럼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라."

라고 하고 말을 마친 뒤에 진짜로 훙서(사망)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26년, 나이는 67세였다.

 

 

 



"사람의 생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를 용서하여 연명하려 하겠느냐. 또한 내가 대사면령을 내리고 죽으면 나를 계승할 자가 무엇으로 새로운 왕의 은혜를 베풀겠느냐."

 

- 성종 왕치 ( 960년 12월 ~ 997년 10월 ) . 고려 제6대 황제

 

- 38세의 젊은 나이에 병을 붕어했다. 붕어하기 직전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대사면을 내리자는 말에 위의 유언을 남기고 거절하였다.

- 여기서 대사면의 사면은 '죄를 용서하여 기소나 형별을 면제하는 것' 그것이다.

 

 

 



"네 이놈! 너도 고려 사람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 강조 ( 974 ~ 1010 ) , 고려 초기 문관이자 권신

 

- '강조의 정변' 이후 1010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황제 '성종'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강조는 통주(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 ) 에서 30만의 군사로 거란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사로 잡혔다.

 

이후 거란 '성종'이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너는 내 신하가 될 것이냐?"

이에 강조가 "나는 고려 사람이다, 왜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지만 강조의 부하, '이현운' 에게 물으니 답하길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라고 하자 강조가 분노하여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네 이놈! 너도 고려 사람이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결국 '강조'는 죽임을 당한다.

 

 

 



"내 병이 크게 더하여 형세가 다시 낫지 못하겠다. 이에 중한 소임을 에게 전하여 준다. 내가 지금 생각하니 평생에 행한 일이 잘한 것은 적고 잘못한 것은 많다. 나를 본받지 말고 다만 옛날 성현의 도를 생각하고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지위에서 게으르지 말고 길이 백성을 복되게 하라."

- 예종 왕우 ( 1079 ~ 1122년 4월 ) , 고려 제16대 황제

 

-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로 인해 종기가 발병한 후 한달만에 붕어하고 만다.

죽기 전 한국의 유명한 산과 강에 제사도 지내고 '이자겸'을 시켜 하늘에 제사도 지내지만 곧 자신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얼른 '태자 왕해'에게 양위하며한다. '예종'은 태자가 어린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었고 태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 태자는 훗날 '인종'으로 불리우며, 14세에 왕위에 오르나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역대급 사건들이 연이어 터져어 고려의 망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반드시 불순한 모의를 하려는 자들이 있을 거다. 는 오늘부터 문병을 끊어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결코 부르지 않겠다."

- 최충헌 ( 1148 ~ 1219년 9월 ) , 제5대 무신집권자

 

- 최충헌은 71세로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최충헌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직감하고 아들 '최우'를 불러 위의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의 치밀한 성격이 돋보이는 말이다.

 

- 최충헌의 예상대로 그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음모가 싹텄고, 총애받았던 대장군 '최준문'이 주도하여 자신들이 '최우'에게 숙청될 것이라 여겨 '최우'가 문병을 오는 틈을 타서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부친의 말을 들은 최우는 문병 한 번 오지 않았고, '김덕명'이 '최우'에게 이 계획을 발설한다.

음모자들은 '최우'를 찾아가서 그에게 "아버님께서 위중하셔서 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라는 전갈을 전했다.

'최우'는 바로 '최준문, 지윤심, 유송절'을 체포하여 먼 섬으로 보내어 도중에 '최준문'을 죽여버렸다...

 

 

 



"내가 내일 창릉에 배알하고 주정하는 체하면서 홍륜의 무리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겠다. 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마땅히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아라."

- 공민왕 왕전 ( 1330년 5월 ~ 1374년 9월 21일 ) , 고려 제 31대 국왕

 

- 공민왕은 말기에 성적인 측면에서 문란하여 스스로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자신을 시중 들게 했다. 나중에는 공민왕이 이들로 하여금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 자신은 이것을 지도, 감독하거나 감상했는데...

 

결국 '자제위' 중 하나인 '홍륜'이 후궁인 '3비 익비 한씨'를 임신 시켰다.

 

이때 내시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쪼르르 달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켰습니다." 라고 말하자 

만취해있던 공민왕은 "홍륜을 죽일 것" 이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한 내시 '최만생' 에게도 "너도 비밀을 아니 같이 죽어 줘야겠어" 라고 말한다.

 

이에 놀란 '최만생'은 당사자인 '홍륜'과 모의하여 술에 만취해 잠을 자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로 난입해서 칼로 난도질하여 그를 시해한다.

향년 45세 였다. 어찌나 처참하게 시해되었는지 뇌수가 병풍에 튀었을 정도로 시신은 참혹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 완풍대군 이원계 ( 1330 ~ 1388년 10월 23일 ) , 조선 제1대 국왕 이성계의 형

 

- 이원계는 이성계의 뜻이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것임을 알고 죽음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칠언 절구의 한시를 남겼는데, 이른바 '절명시' (사람이 죽기 직전 남기는 시) 이다.

 

그리고는 네 명의 아들들을 불러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음독 자살한다.

숙부는 '이성계'이다.

 

- 고려의 충신인지라 사망 후 490년이 지난 1872년 (고종 9년)이 되어서야 '완풍대군'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오랫동안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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