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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예뻐한 자식들과 미워했던 자식들

by 프레임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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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

 

 

영조가 가장 사랑했고 이뻐했던 딸.

후궁 영빈이씨가 낳은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

 

 

화평옹주가 천연두에 걸렸을때 모든 고문과 형벌을 부정탄다고 전부 금지했을 정도.

심지어 화평이 결혼해서 출궁할때는 자기 어머니(숙빈최씨)가 살던 이현궁을 신혼집으로 내려주려 했을 정도.

혼례도 온 장안이 떠들썩할만큼 최고급 초호화판으로 치뤄줌

 

자신이 지나치게 부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게 미안했는지 영조에게 그러지 마시라고 했으나

영조는 계속 화평만을 싸고 돌았다고 한중록에 기록되어있음

 

 

하지만 22살의 젊은 나이에 난산으로 요절하고 마는데 

영조는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화평의 집으로 달려가 밤낮으로 통곡하고

장례도 거의 국상급에 버금가게 치뤄서 이때 동원된 백성들이 농사를 못짓고 폐기할 정도.

신하들이 옹주의 장례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간언했지만 영조는 그 말한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시킴

 

 

화평옹주는 성품 자체가 온순하고 선해서 아버지의 미움을 받는 동생 사도세자를 늘 안쓰럽게 여겼으며

부왕에게 사도세자를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는 등 부자간의 갈등을 중간에서 조율해보려 노력했기 때문에

혹시 화평이 그리 젊은 나이에 죽지만 않았어도 부자간이 그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까라고 한중록은 기록함

 

 

 

 

 

 

화완옹주

 

옹주 중에서는 인지도 탑3안에는 들지않을까 싶음

영빈 이씨가 낳은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화평옹주가 젊은 나이에 죽자 영조의 상심은 엄청났고

눈치가 빠르고 애교가 많은 화완옹주가 언니의 빈자리를 얼른 차지하게 됨

화평이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관계회복을 위해 애썼다면

화완은 독점욕이 강하고 부왕의 총애를 나누려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함

(옹주 따위가 빈궁인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았다가 할머니 인원왕후에게 개털린 기록이 남아있음)

 

 

남편이었던 정치달이 죽자 영조가 바로 버선발로 화완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같은날 왕자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함께 한 조강지처 정성왕후의 죽음을 내팽겨치고 간 거여서

화완옹주에 대한 영조의 편애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음

(당연히 신하들은 이건 예법에 어긋난다며 극구 말렸지만 영조는 그러든말든 딸 집으로 가버렸음)

 

 

드라마 이산에서는 세손시절부터 조카 정조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인 철천지 원수에다

세손 정조를 폐위시키려는 중전(정순왕후)의 행동대장 역할을 다 하지만 사실 이건 역사왜곡에 가까움.

실제로는 조카인 정조를 마치 본인의 아들인양 부담스러울만큼 집착했다고 함.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도 한중록에서 자기 아들에 대한 화완의 집착을 불쾌하게 여겼으며

심지어 화완은 세손빈 시절의 효의왕후에겐 무슨 시어머니라도 된양 호되게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함.

(세손빈을 괴롭히는걸 보다 못한 찐시어머니 혜경궁홍씨가 화완옹주에게 항의했을 정도)

 

 

하지만 부왕 영조가 승하하고 결국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역모죄로 폐서인된 후 유배형에 쳐해졌고

실록의 기록에도 '옹주'가 아니라 '정처(정씨의 처)'라고 기록되버림




 

 

싫어했던 자식들

 

 



화협옹주

 

 

화평옹주의 동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

 

 

태생부터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서 영조가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기가 총애하던 화평옹주와는 같은 공간에도 머물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을 정도.

(이에 동생에게 미안했던 화평이 부왕에게 제발 그러지 마소서라고 간청했을 기록이 있을 정도)

 

심지어 부마였던 신광수까지 영조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근데 이건 신광수 자체가 좀 문제있는 인간이었기도 함)

부마와 세트로 미움을 받았을 수도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역시 영조가 불쾌한 말을 들으면 귀를 물로 씼어버리고

그 물을 화협옹주쪽으로 뿌렸다는 것.

그 비슷한 일을 사도세자도 당했기 때문에 둘이 엄청 친했다고 한다.

(동병상련?)

근데 화협은 영조가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 죽었을 때 크게 슬퍼하기도 하고, 

다른 딸들에 비하면 덜 예뻐한거지 아주 미워한것 같진 않음

 

최근 화협옹주가 쓰던 화장품을 현대버젼으로 재현해서 출시되기도 했다.

 

 

 

 



사도세자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파국관계.

 

 

이미 죽었던 효장세자를 잃고 줄줄이 딸만 낳다가

무려 42세에 본 아들이었기 때문에 영조의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릴때부터 총명해서 영조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영조는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태어난지 100일만에 생모(영빈이씨)와 떼어내고

따로 전각을 내주어 독립적으로 키우려 했는데 하필 시중을 들던 상궁들이 소론(영조의 적)계열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이미 이것부터가 모든 비극의 첫 단추였다며 그들 상궁들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했다고 적고 있다.

 

영조 딴에는 당시 기준 고령이었던 42세에 후계자가 태어난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 빨리 제왕교육을 잘 시켜놔야한다는 조급증이 생겼고

이런 심리는 아들 사도세자를 점점 더 엄히 대하게 만들었다.



사실 성향부터가 둘이 맞지 않았는데 영조는 워낙 자기관리도 철저하고 꼼꼼하고 열심히 사는 성향이었다면

아들 사도세자는 영조가 보기엔 한없이 나태하고 공부엔 관심도 없고 국본이 저래서야 내 후계자 노릇을 하겠는가? 싶었다.

 

사실 사도세자도 충분히 총명했지만 세종대왕 못지않은 공부벌레였던 영조 입장에선 영 흡족하지가 않고

실제로 세자가 칭찬받을 일도 많이 했지만 영조는 아들이 잘하는 부분은 언급도 없다가 실수하기가 무섭게 엄청 갈궜고

심지어 칭찬을 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서 혼을 내니 영조의 성정을 어린 세자로서는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결국 나중에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로 찐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사도세자를 영조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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