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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의 정변, 고평릉 사변

by 프레임 2021.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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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군사 사마의 -

 

유비가 주막에 들어가서 "에휴.. 요즘 황건적이란 것들은" 이라고 한탄하는 걸 지나가던 장비가 듣고, 지나가던 관우가 듣고 셋이 도원결의를 거쳐서.. 위촉오가 박 터지게 싸우다 결국 사마씨의 진이 통일했음.

 

이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역사물의 줄거리이다.

 

이번 글의 주제는 "사마의가 어떻게 정권을 장악했는가?" 라는 글을 작성해 보려 한다.

 



사마의는 조조 시절 출사했으나 조조 때는 잘 나가는 유망주 정도의 위치였고, 조비 때에 가서야 본인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지만 연의에서 제갈량 vs 사마의의 대결로 묘사되는 것과 다르게 1인자 위치는 아니었다.

 

당시에 사마의보다 확실히 위에 있는 조인, 조진 등의 조조의 친척 장군들, 진군 등 노신들이 아직 사마의 위에 많이 있었다.

 

하지만 조비 사후 조예의 정권에서 그는 조진, 조휴, 진군과 함께 탁고대신(託孤大臣)이 된다. 조예 정권이 됨과 동시에 그는 촉의 제갈량과 유사한 위치의 대신이 되었다.

 



조예 정권, 조진이 촉 방면 도독이 되고 사마의는 부도독에 임명된다. 조진이 231년 사망한 이후엔 사마의가 서촉 방면 군권 1인자의 자리에 올라 제갈량과 숙명의 대결을 펼친다.

 

제갈량은 스스로 많은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소식을 하였다 하며, 사마의가 이를 보고 식소사번(食少事煩) 하니 제갈량이 오래 살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그 말대로, 제갈량은 이후 5차 북벌 중 병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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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요동태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켜 관구검(毌丘儉)을 우북평(현재의 베이징)으로 몰아냈는데, 사마의가 파견되어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수세에 몰린 공손연이 항복 후 귀순을 원하였는데, 사마의가 이 때 남긴 말이 유명하다.

 

"싸울 수 있을 때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땐 마땅히 도망가야 한다. 도망갈 수 없을 땐 죽거나 항복해야 하며, 항복할 수 없을 땐 마땅히 죽어야 한다."

 

이후 공손연을 생포 후 참수한다.

 

재미있는 기록으론, 이 때 고구려 동천왕도 지원군을 보내어 공손연을 격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조예, 대군사 사마의 -

 

이후 조예가 사망하고, 조예의 양아들 3대 황제 애제(哀帝) 조방이 즉위한다.

 

문제는, 이 조방이 누구의 아들인가가 상당히 불명확하였다는 것. 이것은 이후 조방의 정통성을 두고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당대의 권신 사마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는 점도 있고.

 

조예도 이것을 모르진 않아서 조우(曹宇), 조휴의 아들 조조(曹肇) 등 종친에게 권력을 주어 사마의를 견제하려 했으나, 조우 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유방(劉放), 손자(孫資) 등의 모함으로 인해 조우, 조조 등은 모두 실각하고, 대신 조진의 아들 조상(曹爽)이 사마의와 함께 조예의 탁고대신이 된다.

 

문제는 조상이 사마의의 아들 뻘이라는 것과, 그 능력 자체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내기 조상과 백전노장 사마의는 일대일의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조예가 우려하던 상황이 그대로 벌어지고 말았다.

 



조상(曹爽) 자 소백(昭伯)

 

조상은 처음에는 사마의를 깍듯이 모시고 모든 일을 사마의와 함께 처리했으나, 조상이 불러들인 심복 하안(何晏) 등의 이간질로 인해 점차 사마의를 멀리하게 되고 이후 사마의를 명예직으로 좌천시켜 사실상 실각시킨다.

 

자신감에 찬 조상은 사촌인 정서장군 하후현(夏侯玄)을 앞세워 촉을 정벌하러 출병하였다. 이때의 병사가 무려 10만(삼국지 촉서 왕평전)에 이르렀지만, 비의와 왕평의 활약으로 이들은 대부분 전멸하고 이후 20년간 위나라는 촉나라를 정벌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 전투를 흥세전투(興勢之戰)라 하며, 한국에선 낙곡대전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조상은 이 패배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사람들을 더더욱 조정에 끌어모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만 하였다. 조상과 함께 출진하던 하후현은 웃음거리가 되었고, 정서장군직을 사임하며 재야로 돌아갔다.

 

서기 249년, 황제 조방은 조상 등을 이끌고 조예의 무덤인 고평릉을 참배하러 떠난다. 이때, 그 동안 늙어서 미친 것처럼 은거하던 사마의는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를 앞세워 위의 수도 낙양(洛陽)을 장악한다.

 

이른바 고평릉 사변(高平陵之變)의 시작이었다.

 



- 낙양과 허창의 거리 -

 

조상 일파가 황제를 모시고 조예의 묘소로 떠난 사이, 사마의와 사마사의 3천 병력이 낙양을 완전히 장악한다.

 

조상 일파의 실정으로 인해, 진군의 아들 진태(陳泰), 태위 장제(蔣濟), 대사농 환범(桓範) 등 대부분의 대신들이 전부 사마의 편에 섰다.

 

그런데 환범이 사마의에게 의탁하러 몸을 이끌던 중, 환범의 아들이 환범에게 이야기한다.

 

"황제는 조상 일파가 모시고 있습니다. 또한 대사농(군수 담당 1인자)의 권한을 아버지께서 가지고 있으니, 조상에게 있는 대장군의 관인을 이용하면 더 많은 병력으로 사마의를 포위할 수 있습니다."

 

환범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아직 사마의가 점령하지 못한 서문을 통해 낙양을 빠져나가고, 허창으로 향했다.

 



- 조예의 무덤 고평릉 -

 

그 무렵 조상 일파에게도 사마의가 낙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연하지만 조상 일파와 사마의는 급이 다른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상 일파는 모두 갈팡질팡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조상이 크게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사마의를 따르는 병력은 기껏해야 수천명이고, 병력을 소집할 수 있는 군권은 대장군인 조상 본인에게 있다. 또한, 군수물자를 담당하던 대사농 환범이 낙양에서 허창으로 오고 있어 그의 인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군수물자를 보급하여 사마의와 맞서 싸울 수 있었다.

 

혹여 사마의와 일전을 벌여 패배했더라도 당시 변방에는 제갈탄, 관구검, 문흠 등 사마의의 정적 관계인 인물들이 있었으니 황제를 모시고 파천하면 되는 일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도 답은 명확했다.

 

이후 환범이 조상에게 도착했고, 환범은 위의 근거를 들어 허창으로 들어가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허창은 조조가 수도로 사용하던 곳으로, 방어태세와 물자가 충분히 갖춰져 있어 시간을 끌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

 



그렇지만 조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환범은 애가 탄 나머지, 조상의 동생 조희(曹羲)에게 다시 한 번 조상에게 한 말을 했지만 조희마저 환범의 말을 듣지 않았다.

 

환범은 정말 마지막으로 조상에게 간했다.

 

"단순히 황제를 모시고 허창에 가 있기만 해도 주위의 자사들이 군대를 이끌고 사마의를 토벌하러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상은 듣지 않았다.

 



- 환범, 코에이 삼국지 -

 

그 무렵 사마의가 보낸 회유의 사절이 조상에게 도착했고, 대장군 등 직위만 회수하고 조상 일파 전부를 살려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조상은 이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황제를 다시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환범은 절망하여 미친듯이 웃었고, 아래와 같은 말을 하였다 한다.

 

"조진 장군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개새끼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조진의 일가와 나의 일가 모두가 멸족당하게 생겼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 사마의 -

 

조상 일파와 환범은 낙양으로 돌아왔으며 모든 관직을 박탈당했다.

 

당연하지만 이후 사마의에 의해 조상, 하안, 환범 등은 처형당하고 그들의 삼족이 멸해졌다.

 

이로써 정권은 사마의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아직 제갈탄, 관구검, 문흠 등의 지방 세력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릇이 안되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면 이런일도 일어남..
저게 조상이 아니라 제갈각이었으면 사마의는 1주일이면 목이 날아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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